[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천마도- 최초의 그림, 최고의 그림

고대의 사람들이 전해준 진귀한 선물, 고고학의 축복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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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도(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천마도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신비의 그림이자 수수께끼의 그림이다. 또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과 죽음을 잇는 형이상학적 그림이다.

천마총 발굴의 결과로 등장한 천마도(天馬圖)의 출토는 역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발견 당시 명칭은 ‘백화수피제 천마도장니’라 했다. 문화재청의 천마도 공식 명칭은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이다. 장니(障泥)는 말다래의 다른 말이다. 장니는 말이 달릴 때 튀는 흙을 방지하기 위해 말안장에 아래에 메다는 부속적 도구이다.

천마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전 무령왕 발굴에서 드러난 허술했던 점을 거울삼아 단단히 준비하고 나선 발굴이었으며,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가장 큰 황남대총 발굴을 지시했지만, 위험부담이 큰 황남대총 대신 상대적으로 작은 155호 고분의 시험발굴을 건의한 문화재 관계자의 설득으로 이루어진 발굴이었다.

화려한 유물발굴을 통해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여러 차례 경주를 다녀갔고 발굴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경주관광개발계획의 첫 삽은 떴지만, 완성을 못 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경주시민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정서이다. 특히 6~70년대를 거쳐 온 세대들에게는 그러하다.

황남대총 발굴을 위한 사전 연습용이었던 155호 고분 발굴은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렸다. 통치자는 화려한 왕권의 상징인 금관에 흥분했지만, 금관보다 천마도가 주는 비중은 훨씬 컸다.

금관은 이미 몇 번 발굴 사례가 있었지만, 천마도는 오로지 한 점뿐인 신라 최초의 회화 그림이기 때문이다.

천마총 발굴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발굴 당시 경주 지역은 유례없는 무더위와 가뭄이 심했는데, 이는 왕의 무덤을 건드렸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며 발굴 현장으로 주민들이 몰려와 항의하며 돌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땅속에서 금관이 드러날 찰나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 번개 소나기가 쏟아져서 직원들이 무서워 사무실로 피신하는 일도 있었다.

발굴관계자와 기자들의 전쟁 아닌 전쟁이 매일 일어나기도 했다. 오늘은 뭐가 나올까? 내일은 뭐가 나올까? 천마총을 둘러싼 신문사 간의 특종 보도 경쟁도 치열했다. 천마총 관련 3대 특종 보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일보의 금관이 나왔다는 특종이고, 둘째는 천마도가 나왔다는 조선일보의 특종이며, 셋째는 추정 연대를 기원 370년 + - 70년이라고 밝힌 특종이다. 이중 마지막 특종 보도자는 국제신문 조갑제 기자라고 한다. 발굴 현장의 나무 조각을 모처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하였고, 문화재연구소 직원을 사칭하여 밝혀낸 재미난 이야기가 조갑제 닷컴의 ‘누가 특종을 하는가’라는 글에 자세히 나온다.

현재 천마총 발굴 50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가 진행 중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마, 다시 만나다’ 특별전을 통해 천마도 실물을 약 9년 만에 공개했다. 하나뿐인 줄 알았던 천마도가 하나가 아님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행사이다.

문화재청과 협업으로 조폐공사에서는 ‘1973, 천마를 깨우다’ 비전 선포식 행사를 하며 천마도를 주제로 한 지폐형 기념 메달과 천마총 출토 금관이 새겨진 카드형 메달을 출시했다.

↑↑ 대릉원 내 천마총 입구 전경.

때를 같이하여 경주시는 ‘2023, 경주 대릉원 미디어아트’ 행사를 대릉원 일원에서 열었다. 미디어아트는 문화유산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한 프로젝트로, 문화유산을 실감 나고 재미있게 알리기 위한 기획으로 문화재청 공모사업에 선정된 멋진 일이다.

아울러 동서남북 어디로든 드나들 수 있도록 출입문을 만들고 무료입장으로 전환한 것은 대릉원 이름에 맞는 일이다. 고분 속 왕들도 초원을 내달리던 유목민의 후손들이기에 담장이 없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천마도는 비록 가로 73㎝, 세로 53㎝로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가치로 환원하면 무한대가 아닐까 싶다. 천마도 그림은 작가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천마총과 천마도를 소재로 한 대표적 문학작품으로 양귀자의 소설 「천마총 가는 길」과 오탁번 시인의 시 「천마도장니」를 들 수 있다. 소설 「천마총 가는 길」 속에는 일제시대와 남북분단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 굴곡진 현대사 가운데 가족사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찾아온 곳이 경주이다. 석굴암, 불국사를 거쳐 이곳 천마총에서 ‘천마총 가는 길’이란 표지판 앞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대구는 묘지 이장 토지보상금 일로 왔지만, 경주까지 온 것은 쉼 그 자체였다. 작가가 소설 내용과 연관성이 별로 없음에도 굳이 「천마총 가는 길」로 책 제목을 정한 이유는 따로 있을지 모른다. 천마도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였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다니던 잡지사의 사직, 고문의 후유증 그리고 시달리던 악몽과 두통을 씻고자 경주에 왔을지 모른다. 이고득락 (離苦得樂)을 위해 천마의 날개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를 선사해주었던 오탁번 시인의 시를 읽으면 천마도 그림이 저절로 떠오른다. 오탁번 시인은 「천마도장니」라는 멋진 시를 남겨놓고 얼마 전 저세상으로 떠났다. 별을 좋아해서 별의 시인, 스타 시인으로 불리던 시인은 왠지 천마를 빌려 타고 별나라로 갔을 것 같다.

↑↑ 한여름 대낮에도 줄을 서는 대릉원 포토존.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天馬)의 가쁜 숨결은
서라벌 뙤약볕 들녘을
다 지우고도 남아
치켜든 꼬리와 날리는 갈기가
오히려 가붓하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의 흰 몸이
하늘과 땅
아스라한 거리만큼 눈부시고
인동(忍冬)덩굴무늬 구름바다 사이로
왕국의 아침 찬란하게 밝아온다
장니(障泥)가 흔들릴 때마다
희고 붉은 흙빛 채색이
이냥 새뜻하여
신라 천년의 옛 사직은
또렷또렷 현재진행형이다
천마의 울음소리에
천오백년 깊은 잠을 자던
왕과 백성들
천마표 타임머신 타고
광속(光速)으로 달려온다.
(오탁번의 시「천마도장니 天馬圖障泥」전문)

강석경 작가는 경주에 거주하며 경주와 관련된 산문집을 여러 권 출간했다. 작가의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에도 천마총에 관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곳곳에 묻어나 있다. 그 가운데 대릉원과 천마총을 거닐며 유목민의 피를 읽고 간 작가의 문장을 옮겨본다.

‘어쩌면 나는 이천 년 전 파지리크 고원의 천막에서 허리에 손칼을 차고, 평원의 거센 바람에 붉어진 빰을 털 위에 대고 잠들던 유목민 여자가 아니었을까. 멀고 먼 기억을 더듬으니 마구와 카펫을 실은 채 마차를 타고 초원을 달리던 내 모습과 화살통을 등 뒤에 걸치고 사슴몰이를 하던 오라비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내 어머니와 함께 짜던 말젖 냄새와 초원의 마른풀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맴돌고, 눈이 아름다운 기마궁사가 태양 아래서 내 손목에 끼워주던 나선형 금팔찌가 아슴푸레 기억한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역시 소설가다운 상상력 덕분에 잠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유목의 사내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처럼 천마도는 무한 상상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그곳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천마도가 뻔한 사실적인 말 그림이었다면 가능했을까? 천마도는 그린 이는 누굴까? 1600년 동안 땅속에서 썩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주에 없는 자작나무 껍질들을 누가 어디에서 가져 왔을까? 연구결과 시베리아산이라 하는데, 봄날에 벗긴 껍질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의문들을 가져오는 천마도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그림이다. 천마도는 고대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진귀한 선물이며 우리나라 고고학의 축복이다. 최초의 그림이 최고의 그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천마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바람은 고대의 신라인이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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