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돌뱅이 김상목·박영숙 씨, 42년 장터 이야기

“아껴주는 장터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할 수 있었어요!”

박근영 기자 / 2023년 0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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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시 오천장에서 포즈를 취한 김상목 씨 박영숙 씨 부부

도무지 인터뷰가 잘 안 된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부인 박영숙 씨와 달리 남편 김상목 씨의 기차화통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다. 기자가 멍해 하자 부부가 크게 웃는다. 이게 마지막 장돌뱅이 김상목·박영숙 씨 부부의 매력이자 꾸밈없이 솔직하고 소탈한 원래 모습이다. 결혼 후 장터에서만 무려 42년, 한몸처럼 붙어 다니며 시장을 누빈 부부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영숙 씨는 6남매 맏이로 돈 벌기 위해 중학교를 나온 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경주를 떠나 ‘공순이’로 소녀기를 보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고자 공장에서 번 돈으로 간호학원에 등록, 과정을 마친 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부산 등 큰 도시에서 병원에 근무하다 경주로 돌아와 개인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김상목 씨를 만났다.

김상목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위었고 어머니가 재가하면서 일찌감치 독립된 삶을 살았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홀로서기를 시작한 김상목 씨는 양복 일을 배워 서울에서 일하다 경주에 돌아와 재단사로 생활하다 박영숙 씨를 만났다.

결혼 후 쪽샘거리에서 양복점을 연 부부는 하필 그때부터 밀어닥친 기성복 물결에 밀려 양복점을 접고 무일푼으로 세상과 맞닥뜨렸다. 무슨 일을 할까 고심하던 박영숙 씨가 우연히 시장에서 물건 파는 장돌뱅이 장사꾼들을 보고 ‘밑천 들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에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옷 장사를 시작했을 때는 길바닥에 티셔츠 몇 장 깔아놓고 파는 게 전부였어요. 소리칠 용기도 없어서 그냥 물건만 내놓고 한쪽에 서 있었어요”

그때는 시장에 나가면 기존 장사꾼들 텃세에 자리 잡기도 힘들었다. 대구 도매상까지 가서 옷을 떼와 팔면 차비도 건질 수 없을 만큼 하찮았다. 그러나 부부가 작정하고 살아보겠다고 달려들자 차츰 장마당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손님을 대하는 요령도 늘었다.

“그때 좌판이 있어야 장사를 제대로 하는데 시장에서 니어카 빌려주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그 니어카 네 귀에 보자기를 펼쳐 묶고 그 위에 옷을 얹어 팔았어요. 그런데 니어카 빌려주는 사람들이 타이어 닳는다고 끌고 다니지도 못하게 해 아주 서러웠어요!”

그러다가 시골 사람들이 장에 나올 때 무엇이 가장 요긴할까 궁리하게 된 부부는 플라스틱 생활용품을 장터에 파는 장사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걸 떼다 팔면 분명히 잘 팔리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플라스틱 제품을 취급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작은 아들이 태어났어요. 어쩔 수 없이 큰아들은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둘째를 업은 채 경주와 포항 일대 장터를 누볐지요”

엄마·아빠 떨어져 사는 큰아들, 엄마·아빠 곁에서 온갖 고생 다 하면서 장터 누비는 작은 아들 둘 다 애처로웠다는 부부다.

“장돌뱅이이로 일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서러움도 많았어요. 특히 경주장에 가면 불편한 게 많아서 경주장은 조금씩 줄이게 되었어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은근히 깔보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시선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 아는 척하며 오히려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더 곤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가 멀찍이 서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얼핏 보게 되었어요. 장사밑천으로 어려운 살림에 트럭까지 사주신 친정아버지이신데..., 딸내미를 보면서 얼마나 애가 타셨겠어요!”

비록 그렇더라도 90년대 말까지는 장사하는 것이 재미 있고 돈벌이도 되어서 재미가 좋았다. 그러나 대부분 장돌뱅이들이 그렇듯 워낙 가진 것 없이 맨바닥에서 출발하다 보니 돈을 모을 사이도 없이 그때그때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데 급급했다. 특히 이 부부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들 둘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돌보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고 회고한다. 두 살 터울의 아들들이 한창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비교적 먼 장은 최대한 줄여서 나가고 가까운 도구장과 장기장 등을 위주로 보았다. 대신 새벽장부터 늦은 장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장을 보는 악바리 생활이었다. 장돌뱅이들의 휴일, ‘비오는 날’이나 겨우 쉴 수 있었다. 그런 억측 끝에 사글세방가 전셋집으로 전세가 ‘내 집’으로 바뀌어 나갔다.


↑↑ 박영숙 씨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 '장터 사람들의 이야기'


무료로 커피 나누며 오랜 사람들 이야기 차곡차곡 정리해, ‘임현식의 시장사람들’, ‘라디오 여성시대’ 등에 출연도

이 부부나 장돌뱅이들 대부분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 하루에 두 번씩 하는 ‘이사’다. “새벽 일찍 장에 나가 물건을 늘어놓았다가 해가 다 져서 장이 파하면 다시 물건들을 차에 실어야 하거든요.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가끔 돈을 빌려서라도 목 좋은 곳에 가게를 열고 싶은 생각도 했지만 자금부담이 더 커 번번이 장터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게 바로 ‘사람’이다.

“장마당에서 만나는 장돌뱅이들, 시골장에서 만나는 주민들과 상상 이상으로 친해졌어요. 이들과 자주 만나며 마음을 나누다 보니 장터가 안방처럼 친숙해졌던 겁니다!”

김상목 씨, 박영숙 씨 부부는 처음 물건 떼오던 대구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대준 포항 죽도시장 도매상 사장님과 지금도 거래 중이다. 40년 전, 자신들이 오래 일하던 자리에 어느 낯선 이들이 먼저 자리를 깔고 장사하는 통에 시비 붙었을 때 우루루 달려와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동료 장돌뱅이들과 지금도 친구나 형제처럼 지낸다. 그뿐만 아니다. 이들 부부는 30년 넘게 시장 나갈 때마다 믹스 커피와 뜨거운 물을 넉넉히 준비해 나간다.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누구에게라도 한 잔씩 대접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4~50잔은 기본적으로 나갔다고. 그래서 더욱 정겨운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제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 있었어요. 한참 지나고 장에 나갔더니 시골 할머니들이 소문 듣고 달려와 반겨주고 온갖 거 챙겨주고 맛있는 것 사주고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어요. 어느 할머니는 저만 마시라고 손수 식혜도 담아서 주고 가셨어요. 또 어떤 분은 돌아가시면서까지 “그릇제이’는 다 나았나?”고 염려하셨다고 해 제가 엉엉 울기도 했어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친근한 분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그분들이 떠난 빈자리들은 자꾸만 커진다. 장터가 인구절벽의 시련에 놓여 점차 사라져 가는 통에 요즘은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

“시골장들이 어렵다 보니 각 지자체들이 시골장을 살린답시고 ‘전통시장’이란 이름으로 장을 보강했어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장을 망쳤어요. 장 볼 사람은 없는데 가게만 늘었으니 결국 장에 가게를 낸 장사꾼들이나 우리 같은 장돌뱅이들 모두를 어렵게 만든 꼴이지요. 그나마 5일장 다니며 장터에 활기를 불어넣던 장돌뱅이들은 지역 주민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고요”

그런 한편 어느 시기부터 시골에도 ‘마트’가 생겨 시장이 힘들어졌고 그 마트보다 더 큰 규모의 ‘대형마트’가 서면서 작은 마트들도 죽어갔다.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졌고 그러는 사이 이제 장터를 돌던 장돌뱅이들 역시 김상목 씨와 박영숙 씨 부부처럼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렸다.

20년 가깝게 운영해온 박영숙 씨의 블로그에는 이런 장터의 느낌,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블로그 인기가 높았던지 방송과 신문, 잡지들이 앞다투어 녹화와 인터뷰를 요청해 한때 이 부부가 전국 방송을 타기도 했다. ‘임현식의 장터 사람들’, 라디오 ‘여성시대’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포항시에서 모집한 10명도 안 되는 블로그 기자단에서 ‘최고 기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상목씨 부부가 장터를 떠돌며 스스로 고생시켰다는 두 아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큰아들은 교대를 나와 연극 활동까지 하는 맹렬 선생님으로, 둘째 아들은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한국화와 서양화 두 부분에서 입선하는 대단한 화가 겸 유명 미술학원 원장님이 되었다. 이들에게 고액 과외는 없었지만 누구도 가르칠 수 없었던 따뜻한 마음의 끈이 늘 붙어 있었던 결과다.

더구나 이 부부, 비록 장터를 떠돌며 고생은 했지만 세상 그 어떤 부부보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믿는 천생배필이다. 이만하면 누구보다 성공한 삶, 자랑할 만한 장돌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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