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사 터-국운 함께한 사찰… 절터엔 천년왕조 흔적만 덩그러니

용장사에 머물던 김시습
이곳에서 天龍寺感舊 시 짓기도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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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188호 천룡사지 삼층석탑 전경. <제공: 문화재청>

이곳은 150m나 되는 고갯길인데 아무 변화 없는 가파른 언덕이라 뒤를 보지 말고 꾸준히 올라가야 한다. 지루함과 숨 가쁨을 참고 고원 등성 위에 마지막 발을 딛고 올라섰을 때 천상의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눈앞에 펼쳐지니…,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며 경주에서 평생을 교육자이자 향토사학자로 살았던 윤경렬(1916∼1999) 선생이 경주 남산에 있는 천룡사 터 가는 길을 묘사한 글이다.

경주에서 남산은 서울로 치자면 북악산이나 인왕산쯤에 해당한다. 수도를 지키는 요새인 동시에 그 안에서 삶을 꾸려가던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영산이란 점에서다. 남산이란 이름은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남산은 남북으로 9㎞가량 길게 뻗어 있는데, 대표적인 봉우리는 북쪽 금오봉(466m)과 남쪽 고위봉(494m)이다.

천룡사 터는 고위봉 아래 해발 400m쯤 되는 곳 넓은 평지에 있다. 윤경렬 선생이 ‘천상의 별유천지’로 묘사한 곳이다. 지금은 복원된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과 몇몇 석재만이 남아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건 주체와 연대에 대해선 의견 분분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룡사는 ‘수리사’ 또는 ‘고사’(高寺)라고도 불렸다. 정수리, 다시 말해 꼭대기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은 또 다른 이름에 대한 유래다.


서로 전하는 말에, 옛날 단월(檀越, 시주하는 사람) 부부가 천녀(天女)와 용녀(女)라는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천룡사(龍寺)라고 이름 지었다.

‘삼국유사’ 천룡사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이름 유래 외에도 이 절을 민간인이 창건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선 당의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을 파괴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 말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악붕귀가 신라를 방문한 때는 나당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에 따르면, 악붕귀는 신라를 살펴보고 오라는 당 황제의 명을 받아 문무왕대인 671년 이후쯤 경주 사천왕사와 망덕사를 방문했다. 이때 천룡사도 다녀간 것으로 추정된다. 천룡사가 호국사찰 또는 국가의 주요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으로, 민간인이 창건했다는 것과는 다소 상충되는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또, ‘토론삼한집’이란 문헌을 인용해 “계림의 땅에는 흘러온 두 물줄기와 거슬러 흐르는 한 물줄기가 있는데, 그 물줄기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곧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에 이른다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천룡사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문무왕대에 이미 창건해있었다는 사실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삼층석탑을 비롯해 절터 발굴 때 나온 석조 유구와 출토 유물의 제작 시기가 모두 통일신라기인 9세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엔 또 “통일신라 말기에 폐사된 것을 1040년(고려 정종 6년)에 최승로(崔承老, 927~989)의 손자 최제안(崔薺顔, ?~1046)이 수리하고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천룡사는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쯤 창건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려 초 이 절의 중창을 즈음해 중국식 풍수를 논하는 이가 악붕귀의 권위를 빌려 천룡사의 격을 높이고자 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조선 중기까지 명승지로 이름 떨쳐

1668년 5월 17일. 때때로 흐렸다가 맑았다. 아침식사 뒤에 출발하여 20여 리를 가서 금오산(남산)에 있는 개선사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절에 있는 충신스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충신을 데리고 걸어서 뒤쪽 봉우리를 넘었다. 노비 두 명에게 말을 몰고 짐을 짊어지고 먼저 천룡사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중략) 태양이 몹시 내리 쬐어 등에 땀이 흐르고 호흡이 급해져서 열 걸음을 가서 한 번 쉬면서 10여 리를 간신히 가서 절에 도착하였다. 스님 묘혜와 도신 등이 나와 맞이하였고 공루에 앉으니 서늘한 기운이 들어왔다. 불존 지초스님이 나와 보았고, 정원이 인도하여 불존 방에 이르러 저녁 식사한 뒤에 이내 잤다. 천룡사는 다른 곳에는 없는 볼거리가 있었고, 절 뒤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는 매우 수려하였다. 스님의 성품 또한 좋았다.


조선 중기 유학자 우담 정시한(1625~1707)이 쓴 천룡사에 관한 기록이다. 그는 숙종 때인 1686년 3월부터 1688년 9월까지 강원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의 명산고찰을 답사한 뒤 그 내용을 ‘산중일기’란 책에 담았다. 위의 기록도 ‘산중일기’에 담긴 내용의 일부다.

비슷한 시기 이곳에선 불교 경전도 간행됐다. 전해오는 ‘묘법연화경’ 중에 ‘강희 27년(숙종 14년, 1688년) 천룡사에서 간행했다’는 내용의 간기(刊記)가 남아 있다. 실제로 2016년 화랑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서 경판(經板)을 새기고 그것을 보관했던 건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대형 건물터가 이곳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천룡사는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쯤 창건돼 1040년 이전 어느 시점에 크게 훼손됐다가 고려 때 최제안이 중수했다. 이후 조선 중기, 적어도 숙종 14년(1688)까지는 명사들의 방문이 이어지며 명승지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조선 중기엔 불교 경전을 제작할 정도로 사세가 높았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 점차 쇠퇴하다 폐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상의 별천지’에 남은 삼층석탑

이곳은 지금까지 다섯 차례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1990년 동국대 경주캠퍼스(현 WISE캠퍼스) 박물관은 탑 터와 그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여러 점의 불상을 출토했고, 이듬해인 1991년엔 삼층석탑을 복원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여 절터 일부 구역에서 11개의 건물터를 확인했고, 금당(金堂)을 3차례에 걸쳐 수리한 사실을 확인했다. 13~16세기에 이르는 청자 조각과 다량의 분청사기 조각도 수습했다.

2004년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경주 남산 정밀학술조사를 통해 천룡사 터 주변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을 확인했고, 2006년 발굴조사에선 복원된 삼층석탑 가운데 탑의 1층 일부 부재도 발견했다. 2016년에는 앞서 언급한 화랑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현재 복원된 삼층석탑 주변엔 석조 석등, 맷돌 등 각종 석재 유물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선 고위산 정상부가 보이는데 정상에서 산 아래로 길게 뻗은 바위가 천룡바위다. 천룡사지와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용장사에 머물고 있던 김시습은 이곳에 와서 ‘천룡사에서 옛 일을 회상하다’(天龍寺感舊)란 시를 지었다.


최제안이 천녀와 용녀라는 두 여인에게
수명장수 축원하기 위하여 절을 중건하였네
지난 일 이미 속세의 한바탕 꿈이 되었건만
부질없이 산새만 여전히 시끄럽게 울어대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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