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 신라 패망의 아픔, 흐르는 물길에 고스란히

포석정과 신라경애왕
역사적 진실과 오해에 대한 편견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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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곡수 잔을 나르던 자리
(曲水傳觴地)

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흘러오네
(淸流激石來)

천년의 유적 남은 그 자리
(千年遺跡在)

좋은 계절 늦봄이 돌아왔네
(佳節暮春廻)

지나는 객은 전성기 생각하고
(過客思全盛)

지내는 백성들 경애왕을 말하네
(居民說景哀)

오릉의 북쪽에서 상심하자니
(傷心五陵北)

예전 못과 누대 잡초에 뒤덮였네
(蕪沒舊池臺)

↑↑ 신라 제55대 경애왕의 마지막 이야기가 남아 있는 포석정. <제공: 경주시>


경애왕 마지막 이야기 품은 포석정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쓴 ‘포석정에서 회고하다’(鮑石亭懷古)란 시다. 그의 시문집인 ‘퇴우당집’(退憂堂集)에 실려 있다.

김수흥은 현종 원년(1660) 임금이 내린 시호 교지를 전달하는 사시관(賜諡官) 자격으로 경주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경주부의 안내를 받아 봉황대, 첨성대, 미추왕릉, 월성, 계림, 안압지(지금의 동궁과월지), 분황사, 백률사, 금장대, 김유신묘, 포석정 등을 둘러봤다. 이 시는 그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흥이 방문했던 포석정은 남산 북서쪽 자락에 있다. 신라 때 국가 의례나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제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다는 기록과 효종랑(孝宗郞)이라는 화랑이 포석정에서 놀았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의 마지막 이야기도 이곳에 남아있다. 927년 후백제가 경주로 쳐들어왔을 때에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다가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포석정에서 볼만한 건 별로 없다. 63토막의 화강암을 다듬어 구불구불하게 물길을 만든 유명한 석조 구조물이 전부다. 물길의 너비는 30cm, 깊이는 22cm, 전체 길이는 22m 정도다. 이 물길에 술잔을 띄우면 대략 12곳에서 술잔이 머물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굴곡진 물길 위에 술잔을 띄워 그 술잔이 머무는 곳에 있는 사람이 시를 읊는 연회)을 즐기기 위한 수로로, 일제강점기에 정비한 것이다. 물길 주변엔 돌로 만든 우물과 기타 석재들이 남아 있다. 포석정이란 이름은 돌로 만든 물길이 전복(鮑, 전복 포)을 닮아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포석정의 성격에 대해선 연회장소, 혹은 제의 공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연회장소라기보다 제의 공간으로 보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다만 구체적인 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계욕(禊浴, 3월에 부정한 것을 씻어내기 위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례)의 장소, 팔관회(八關會, 불교와 토속신앙이 합쳐진 국가 행사로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을 위한 위령제의 기능을 한 의례) 장소, 길례(吉禮)를 행하던 장소 등으로 차이를 보인다.

정리하자면 이곳에서 행해졌던 의례의 성격에 대해선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주변에 포석정과 연관된 건물지가 확인됐고 기와 등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신라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 경주 남산 삼릉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경애왕릉. <제공: 경주시>


포석정에 얽힌 오해와 진실

포석정은 알다시피 ‘망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유적이다. 이 무덤의 주인 경애왕 또한 포석정에서 신하, 궁녀들과 술판을 벌이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1000년 사직을 나락에 빠뜨린 부끄러운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927년 9월에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고울부(지금의 경북 영천)에 이르니 경애왕이 우리(고려) 태조(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해 날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그해 11월 서울(경주)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과 종실, 외척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찌할 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도망가고 종실과 공경대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나라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좌우 신하들에게 신라 왕을 찾도록 했다. 왕은 왕비와 첩들과 함께 후궁에 숨어 있었다. 견훤은 왕을 백성 앞으로 끌어내 자결하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다. 부하들은 왕의 빈첩을 욕보였다.

‘삼국유사’는 경애왕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는데도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다.

그러나 여기서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경애왕이 술판을 벌였다는 시기는 음력 11월, 다시 말해 한겨울이었다. 게다가 경애왕은 이보다 두 달 전인 음력 9월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인근 영천까지 진격하는 위험에 처하자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왕건은 구원병 1만명을 보냈는데, 이들이 미처 경주에 도달하기도 전에 견훤군이 침략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적을 목전에 두고 술판을 벌일 왕이 있을까. 더구나 한겨울 노천에서 술판을 벌였을까.

‘화랑세기’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 혹은 ‘포석(鮑石)’이다. 포석‘정’(亭)이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포석‘사’(祠)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 포석사에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추앙받은 문노(文努)의 화상을 모셨다. 문노는 제8대 풍월주(재임 579~582년)였다. 그는 삼국통일 이후 ‘사기(士氣)의 종주(宗主)’ 즉 ‘씩씩한 기운의 으뜸’으로 추앙받았다. 그런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열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포석사에서는 귀족들의 길례(吉禮)도 열렸다. 문노와 윤궁이 혼인할 때는 진평대왕이 친히 포석사에 간 적이 있다. 또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혼인식이 열린 곳도 바로 포석사였다. 이런 점에 미뤄 보면 경애왕은 술판을 벌이려 한겨울에 포석정으로 간 것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나라의 안녕을 간절히 빌기 위해 왕실과 귀족을 동원해 포석사로 간 것이라는 유추도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삼국유사’ ‘삼국사기’ 기록은 신라를 무너뜨린 역사의 승자 ‘고려’ 때의 것이다. 포석정과 경애왕의 이야기는 새 왕조 탄생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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