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물속의 절, 고선사지<高仙寺址>

신라 29대 무열왕 이전 창건 추정
1975년 덕동댐 건설로 경주박물관으로 ‘유물’ 옮겨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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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댁동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 암곡동 고선사지 3층 석탑. <사진: 문화재청>

국립경주박물관을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르는 장소가 있다. ‘별일 없었습니까?’ 그리운 사람처럼 찾아가 안부를 묻고 싶은 곳은 박물관 뒤뜰의 고선사지 탑이다.

그리운 것들은 지금에 없거나 사라진 경우가 많다. 고선사지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경주에 흔한 것이 폐사지이지만 고선사지만은 좀 특별하다. 왜냐하면 탑이나 주춧돌이라도 남아 허전한 들판과 산기슭의 서정이라도 지키고 선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고선사지는 물속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선사지는 3층 석탑과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와 같은 귀중한 유물과 원효와 관련된 사복불언(蛇福不言)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1975년 덕동댐 건설로 석탑을 비롯한 금당 터와 비각들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선사지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29대 무열왕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선사지는 1탑 1금당 양식으로, 한 공간이 아닌 두 공간으로 나눠 배치된 특이한 양식이다. 이때부터 탑 중심에서 금당 중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학술적 비중이 높은 곳이다.

국보이기도 한 고선사지 3층 석탑은 감은사지 탑과 가장 많이 비교된다. 닮은 듯 다른 듯해서 같은 장인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감은사지 탑보다 미학적으로 우위에 두는 사람들도 있다.

사학가 고유섭 선생은 고선사지 탑에 대해서 모든 점에서 한국 석탑의 범례를 이루고 있으며 노성한 대인의 품격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한 강우방 교수도 고선사 탑이 자기 자리에 있지 못하고 수몰을 피하여 박물관 정원으로 옮겨진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저서『강우방 예술론,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 경주국립박물관 경내로 이전한 고선사지 3층 석탑.

“1997년 1월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이래, 박물관 뜰 한구석에 침묵하고 있는 고선사 석탑을 매일 찾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 그 탑은 우람하여 그 앞에 서 있으면 나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화강암을 두부 썰 듯이 덤덤하게 판석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폼이 제법 대단하여 큰 맛이 넘친다. 고선사에는 원효보살(元曉菩薩)이 머물렀으므로 매일 이 탑을 돌았을지도 모른다. 암곡 절터는 유현(幽玄)한 자리였다. 산 중턱에 조금 넓은 평지가 있었는데, 좁은 계곡을 옆에 끼고 고선사 탑은 그 우람한 모습으로 산곡(山谷)을 메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원 구석에 서 있으니 집 잃은 처량한 신세여서 나의 마음조차 쓸쓸하다”

고선사지 탑에 대해 평소 느끼는 필자의 마음과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여 반갑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학자의 마음과 일반인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당화상비는 원효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어 원효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손자인 설중업이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각간 김언승의 후원으로 세운 것이다. 서당이란 원효의 어릴 적 이름이다. 1914년 고선사의 옛터에서 3편으로 조각난 채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그리고 비신의 상단부는 1968년 동천동 부근 농가에서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성명은 전하지 않고, 비에 글을 새긴 사람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전체 33행에 각 행은 61자로 추정되며, 문장은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사륙변려체이다.

↑↑ 덕동댐에 잠긴 고선사지.

“수공 2년(686) 3월 30일 혈사에서 마치니, 나이 70이었다. 곧 절의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감실을 만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지도 않아서 말 탄 무리가 떼를 지어 장차 유골을 가져가려 하였다”

비의 파편에 남아있는 기록의 일부이다. 원효에 관한 정확하고 확실한 기록인 한편 미스테리한 기록의 일부도 엿보인다. 어떤 이유로 유해를 가져가려 했을까? 사라져서 알 수 없는 뒷부분이 궁금해진다.

원효가 고선사지에 있을 무렵 사복불언(蛇福不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온다. 다음은 원효와 사복의 대화 내용이다.

“태어나지 말기를, 죽음이 괴로우니. 죽지 말기를, 태어남이 괴로우니” 사복이 “게송이 복잡하다”고 하자 다시 고쳐서 하기를 “죽고 태어남이 괴롭구나!”라고 하였다. (“莫生兮, 其死也苦. 莫死兮, 其生也苦” “詞煩” “死生苦兮”)

고선사지는 생과 사의 진중한 문답을 이리도 쉽게 주고받는 사복 설화의 배경이기도 하다. 사복설화는 불교적으로 삶과 죽음, 윤회의 업보를 통해 현생의 정진을 말하고 있다. 원효와 사복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도「사복불언찬」이란 시를 지었다. 고선사지와 이웃한 마을에서 태어난 것도 인연으로 작용했는지 필자도 시 한 편 쓸 수밖에 없었다. 문학에 뜻을 세우던 젊은 날에 쓴 졸시「사복에게 배우는 시론」을 인용해 본다.

↑↑ 덕동댐 망향정에 전시된 고선사지 사진.

사복에게 배우는 시론

말 많은 세상
제대로 한마디 하기 위하여
무수한 형용사와 수식어의 숲
상징과 은유의 계곡 헤매이다가
겨우 찾아낸 금빛 은빛 이파리들
자신만만 펼쳐 보일 때
말이 너무 많다

말과 말사이에 섬을 만들어라
그 여백의 공간 물결치게 하라
이르는 당신의 말에
버리기가 아깝고 쓰기도 힘들다 하면
아예 쓰지를 말라 하네

말하기 위하여 말하지 않는 법을
늦은 밤 무릎 끓고 앉아 배우는
당신의 시론!

고선사지 탑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물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물빛이라도 보이는 어느 곳 언덕배기에 다시 자리 잡을 수는 없을까? 그것마저 어렵다면 물가에 안내판이라도 설치하고 그 옛날 사진 한 장이라도 걸어두면 어떨까?
덕동호 둘레길이면 참 좋겠다. 그곳은 오어사, 기림사, 골굴사 등 원효의 길과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하다.

박물관 외진 구석 고선사지 탑에서는 원효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다. 탑은 산과 강,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야 제격이다. 고선사지 탑도 무장봉에서 알천으로 흘러드는 물소리와 동대봉산 넘어오는 동해 맑은 바람 소리를 그리워할 것이다. 실향민처럼 쓸쓸하게 서 있는 고선사지 탑, 남의 집 셋방살이하듯 불편한 기색으로 서 있음이 안타깝다.

눈을 감으면 종달새 나는 푸른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탑이 보인다. 물속의 절 갈 수 없는 그곳, 오늘 밤 꿈속 그 옛날 하얀 신작로 길을 따라 고선사지 찾아가면 왠지 뎅 뎅 뎅 종소리 들려 올 것만 같다. 원효의 법문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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