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깡패’가 유명했던 엉뚱한 이유

마을 곳곳서 펼쳐지는 자연의 경이로움

박근영 기자 / 2023년 09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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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린 시절 작은아버지댁이었던 교촌 구새댁 안채 모습

“새로 왔으면 고마 조용히 지내지 말라꼬 나무 아를 이래 뚜디리 팼노 말이다!”

대문을 밀고 들어온 어느 아주머니가 숨넘어가 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저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에서 형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내가 암만 가마 있을라 캐도 저노마 저게 맨날 한판 붙자 카는데 그라믄 우야는기요?”

우리가 처음 교촌에 이주해 갔을 때 어린 나는 문밖출입을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자주 들었다. 당시 교촌은 ‘교리’라는 말로 더 불렸는데 그 교리라는 명칭 뒤에 쉽게 따라붙은 말이 깡패였다. 돌이켜 보면 교촌이 깡패와 조합을 이룬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교촌은 기본적으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었다. 교촌이라는 명칭 역시 조선시대 관립학교인 ‘향교’의 교(校)에서는 나온 말이다. 더욱이 교촌은 영남일대의 거부 경주최부자와 그 가문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고 대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나눔을 실현해온 집안이다. 이런 마을이 깡패라는 끔찍한 말과 조합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조화다.



‘교리깡패’는 어린 시절 은근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다른 동네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말의 이면에는 절대적이라 할 만한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요석궁의 존재 때문이었다. 요석궁은 경주 최부자댁 일가인 최모 회장님이 경영하는 곳이었는데 이 분이 젊은 시절부터 강단이 세고 용력이 남달라 오래도록 전국을 아우르는 건달들의 대부로 알려져 있었다.

요석궁은 당시 전국에 소문난 요정이었고 술을 파는 곳이다 보니 자연 이런 저런 소문에 휩싸였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직접 들었던 말로는 요석궁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건달들이 다 찾아와 최모 회장님을 모시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누구도 함부로 하기 힘든 독보적인 건달들의 아성이 됐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들었던 이 소문은 아주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경주최부자 책을 쓰면서 최부자댁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께 여쭤본 바나 내 경험에 비추어 건달들이 떼로 몰려다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염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요석궁 최 회장님이 도량이 넓어 곤궁에 처한 건달들을 잘 보살펴준다는 소문이 전국에 나 있었고 그 소문을 듣고 이름깨나 있는 건달들이 찾아와 몸을 의탁한 경우가 가끔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고 만약 있었더라도 누가 건달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은근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던 ‘교리깡패’라는 낙인과 달리 마을은 특별한 폭력사태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험악한 별칭 때문인지 타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도 지레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요컨대 ‘교리깡패’가 유명했던 이유는 실제로 깡패가 횡행해서가 아닌 요석궁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이런저런 소문들이 부풀려져 생긴 말이었다.

물론 아주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의 교촌에 사는 젊은이들이 다소 거센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전에 언급했듯 교촌 인근에는 최부자댁 일가들 이외에 놋전을 제외하고도 80여호의 인가가 있었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그런데 이들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다소 거칠게 대하는 면이 있었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교촌에 들어와 살 때만 해도 나보다 열서너 살 이상 차이 나는 내 사촌 형들이 먼저 터 잡고 살던 젊은이들과 적지 않게 신경전을 벌였을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 집안 형들이 체격이 크고 완력이 좋은데다 운동까지 잘해 삽시간에 마을을 평정하면서 텃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형 역시 고교 시절 교촌으로 이사 오면서 동네의 또래에게 며칠이나 갈굼을 당한 끝에 대판 싸움을 벌여 상대를 묵사발 낸 적이 있다. 이 글 서두에 쓴 드잡이는 바로 그때의 일이다.

그렇듯 그 시대는 어느 지역이나 그 정도의 텃새와 그로 인한 사건이 흔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교촌 말고도 바로 인근의 놋전깡패, 건천깡패, 안강깡패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는데 정작 그쪽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오히려 교리깡패라고 불렀던 험악한 분위기에 비해서는 지극히 평화로웠던 마을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교리깡패가 다분히 과장된 말인 이면에 교촌은 묘하게 사람들이 나뉘어 사는 분위기였다. 내가 교촌에 살았던 것은 다섯 살 적부터 고교졸업할 때까지였고 그 후로도 집이 헐리기 한 해 전이었던 2007년까지 본가가 교촌에 있어서 누구보다 교촌의 최근 현황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을 거의 모른 채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고 그 후로도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지냈다.



최부자댁 일가들은 마을 일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런 존중과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럴 만했던 것이 최부자댁 일가 사람들은 마을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마을 공동사업에도 나오지 않았고 반상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내 또래 연령대가 없기도 했지만 최부자댁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을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당시 어머니가 부녀회 부회장을 하시면서 동네를 내집 드나들 듯 다니셨는데 온갖 집안 형편을 미주알고주알 꿰고 계셨으면서도 유독 최부자댁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거의 정보가 없었던 것도 최부자댁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았던 정황이다. 다만 어머니는 최부자 일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느 집을 지칭해 그 집 아들들의 이름을 붙여 ‘OO이 최선생댁’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 이유는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늦게, 내가 교촌 최부자댁 일가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이미 경주 최부자댁 일가들은 교촌을 다수 떠나 있었다.

내가 모시고 책을 쓴 최염 선생님만 해도 젊은 시절에 할아버지이신 최준 선생님을 모시기 위해 대구와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셨고 본가에서 지내신 일이 많지 않으셨다. 자제분들도 자연히 최염 선생님을 따라 경주를 떠나 살았으니 마을 사람들과 섞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최부자댁 일가들이 살던 다른 집들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내 또래 후손들은 교촌에 거의 없었고 최소한 4~5년 이상 선배들이 몇 명 남아 있을 뿐이었다. 중요한 최부자댁 일가였던 또 한 곳은 요석궁으로 상업지가 되어 역시 일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집이 되어 있었다. 그 외 몇 그러니 불과 이런 집들을 빼면 교촌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기와집 중 최부자댁 일가들이 사는 곳은 겨우 다섯 곳뿐이었고 그나마 젊은이들은 대부분 외지로 떠난 채였던 셈이다. 그나마도 원래 최부자댁 일가들이 살던 집 중 중요한 두 곳이 우리 아버지 형제분들이 사서 들어와 사셨다. 구새댁과 파훼댁이 아버지 형제분들이 살던 집이었다.

이렇듯 최부자댁 일가들이 교촌에서 조금씩 멀어져 살아가기 시작할 무렵 반대로 아버지 형제분들은 교촌에 대거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5남1녀, 6남매 중 막내이셨는데 앞 회에서 말했듯 둘째 작은아버지와 함께 우리가 살던 최부자댁 권속인 구새댁을 사오셔서 작은아버지는 안채를, 아버지는 사랑채를 나누어 사셨다. 두 분 이외에 위로 고모님과 큰아버지, 셋째 작은아버지가 교촌에 이주해 사셨다. 이렇다 보니 원래 최부자댁으로 인해 최씨가 많이 살던 동네에 갑자기 박씨가 부쩍 늘어서 살게 되는 현상이 생겼다.

더구나 아버지 형제분들은 모두 6~8남매씩 자녀들을 두셨는데 내 사촌들만 30명에 이를 만큼 박씨가 복닥거리게 되었다. 그중에서 절대적으로 아들 비율이 많았던 우리 집안 특성으로 인해 어느 사이엔가 마을을 나서면 어디서나 사촌 형들이 나와 있을 만큼 우리 집안은 짧은 시간에 교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교촌은 최부자댁 일가들이 조용하게 전통을 잇는 가운데 우리 집안을 비롯해 교촌으로 이주해온 새로운 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동네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조화의 바닥에는 존중과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최부자댁 일가를 자연스럽게 예우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존중에는 교촌의 터줏대감이자 경주의 가장 대표적 양반가인 최부자댁에 대한 존경심이 넓고 깊게 깔려 있었다. 더욱이 백성을 아끼는데 누구보다 열의가 높았던 댁이 최부자댁이었으니 그 후손들일망정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부자댁 일가분들이 마을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알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편하고 자유롭게 존중하려는 배려였을 수도 있다. 5~60년 전만 해도 은근히 집안을 따지던 시대였는데 누구나 아는 최고의 집안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사이게 섞이게 되면 그 자체로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뒤에 교촌에 살았던 최부자댁 선배님들에게 이때의 일을 물어본즉 비슷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존중은 반드시 함께 해야 생기는 것이 아님을 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교리깡패가 유명했던 것에는 최부자댁의 전통에 반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입방아에 오르면서 생긴 헤프닝일 것이다. 내 눈에는 교촌은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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