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신 할머니의 교동법주와 윤경렬·이종룡 선생님의 가르침

건강한 삶의 이정표

박근영 기자 / 2023년 0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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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요, 이거는 먼기요?”
“어, 거거는 유자다”
“그라믄 묵을 수 있는 건기요?”
“묵기는 하는데 아직은 새고로버가 안 대고 냉자 익으면 차로 끼래 마시는 기다”

할머니는 커다란 유자 열매를 가리키며 아직은 딸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내심 하나 얻어먹으려던 빤한 속셈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 교동법주를 담그시는 배영신 할머니

배영신 할머니의 자상함은 경주최부자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를 내 가슴에 심어놓았다.
교촌이 최부자댁 일가로 이루어진 마을이면서도 최부자댁 사람들이 마을에서 거의 활약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배영신 할머니의 기억은 무척 인상적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뵌 배영신 할머니는 전통적인 할머니 모습을 거의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이를테면 참빗으로 곱게 빚은 머리를 비녀로 쪽지어 계셨고 늘 계절에 맞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최부자댁의 오랜 일가이신 배영신 할머니는 마을 일에도 관심이 많아 마을 부녀회 회장을 맡아 오래 활동하셨다. 말랐지만 온화한 인상의 할머니는 그때 이미 연세가 70세쯤으로 실제로 동네일은 돌보지 못하셨고 부회장인 어머니와 상의하시면서 부녀회 일을 돌보셨다. 할머니는 특히 마을 아이들 독서에 관심이 많아 할머니 댁 집안 대청에 커다란 책꽂이를 마련하고 4~500권은 족히 되는 책을 꽂아놓고 동네 아이들을 위해 ‘마을문고’를 운영하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어린이들을 무척 귀여워하셔서 내가 책을 빌리러 가면 과자나 사탕을 내주면서 따듯이 칭찬하고 격려해주시곤 했는데 지금도 그 자애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그 시대에 풍금을 치실 줄 아는 아주 신식 할머니셔서 그 모습 자체로 무척 신기했다.

할머니는 화초를 아주 잘 기르셨다. 할머니는 유자와 선인장 같은, 다른 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초들을 많이 가지고 계셔서 꽃 좋아하는 어머니가 자주 꽃구경을 다니곤 하셨다. 추위에 약한 화초들이 많다 보니 할머니는 집 기단 아래쪽에 땅을 파고 약 반 평쯤 되는 온실도 만들어두었는데 겨울의 찬 기온에 약한 화분들을 이 온실에 넣고 겨울을 나도록 하셨다. 할머니 댁 화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파초’인데 어린 나는 그 파초를 ‘바나나 나무’로 알고 신기해했다. 어머니께서 할머니께 파초 싹 하나를 얻어 우리집 꽃밭에도 옮겨 심었는데 그해 겨울 얼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집에도 온실을 만들어 삭아서 떨어진 잎은 제거하고 둥치를 짚으로 둘러싸 보존했던 기억이 새롭다.

배영신 할머니는 최부자댁 바로 옆집, 지금의 교동법주 간판이 걸린 집의 안주인이셨다. 교동법주라는 말에서 보듯 최부자댁 전통주로 알려진 교동법주를 담그신 장본인이시다. 뒤에 경주 최부자댁 전통 가주를 직접 맛볼 기회가 있었는데 교동법주와는 당도와 점도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교동법주는 그 나름의 운치와 향기가 있어 그 자체로 명주라 하기에 손색없고 교촌의 명산품이 된 것 역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할머니는 원래 안동 출신으로 ‘안동 배부자댁’ 집안의 후손이신데 어쩌면 그 댁 전통 가주일지도 모른다. 교동법주는 전국의 어느 술보다 향기롭고 맛이 좋아 나도 즐기는 술인데 교동법주를 마실 때면 언제나 할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 윤경렬 선생님


윤경렬 선생님께 배운 경주와 이종룡 선생님께 배운 글쓰기의 기본이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 이종룡 선생님
최부자댁 일가는 아니지만 교촌에는 대단한 분들이 세 들어 사셨다. 먼저 알려드릴 분이 경주의 향토사학자이자 인형연구가로 경주 신라문화동인회의 창립 주축이셨던 윤경렬 선생님이다. 윤경렬 선생님은 우리 뒷집인, 바로 위에서 소개한, 채영신 할머니 댁에서 새 들어 사셨는데 늘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 여름에는 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 겨울에는 검은 두루마기에 검정 고무신 식이었다. 머리는 반곱슬의 웨이브 진 머리를 길게 길러서 자연스럽게 풀어헤치거나 아주 가끔 핀으로 머릿결을 고정하고 다니셨는데 그 휘날리는 백발의 모습이 표표한 신선처럼 여겨졌다. 어릴 때부터 인사 잘하기로 소문났던 나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어김없이 작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답례해주곤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경주시립도서관이 있던 서라벌문화회관 별실에서 토요일마다 열린 어린이 향토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 이유도 윤경렬 선생님 덕분이었다. 뒤에 어린이 향토학교는 경주국립박물관이 생기면서 그 별관 지하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어린이 박물관학교’로 확대되었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게 내가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원초적인 계기였다. 선생님은 특히 칠판에 부처님 그림을 순식간에 그리시거나 탑이나 나무 등을 쉽게 그리면서 열강을 해주셨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윤경렬 선생님의 기억은 ‘무서운 인형’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가지고 놀 게 별로 없었던 시골에서 윤경렬 선생님 댁에서 가끔씩 굴러나오는 인형들은 아주 특별한 장난감이었다. 붉은 토기에 거친 재질의 실 같은 것으로 수염을 붙여 놓은 다소 무서운 형상의 인형은 그때는 몰랐지만 고청사가 만든 최고의 한국형 경주 토산품으로 알려졌다. 나는 바로 그 기막힌 인형의 파편을 가지고 놀았던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한 아이였다.

윤경렬 선생님은 남산을 무척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기셔서 각별한 연구업적을 남기신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학입시시험을 치른 후 윤경렬 선생님의 ‘남산연구’ 책을 기반으로 한 달 동안 샅샅이 남산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게 모두 선생님과의 인연 덕분이다.

또 한 분, 교촌에 오래 사시면서 마을 일에도 적극적이셨던 분이 경주고등학교에서 오래 국어 교사로 근무시면서 경주의 야간학교인 ‘한림학교’를 이끄셨던 이종룡 선생님이시다. 이종룡 선생님은 내 어릴 때 우리 집 바로 앞,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셨는데 공교롭게도 슬하의 네 자녀분들이 우리 누나들과 형과 비슷한 연령대였고 사모님께서 어머니와 친숙하셔서 서로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호박을 심었는데 선생님댁 호박넝쿨이 우리집을 넘어와 호박을 맺으면 우리가 그 호박을 담장 위에 올려놓았고 우리 호박이 선생님 댁으로 넘어가 맺으면 선생님 댁에서 우리 담장에 올려놓곤 하셨다. 한번은 선생님과 아버지께서 서로 호박을 담장에 올리다 마주쳐서 ‘이러지 말고 앞으로는 그냥 자기 것처럼 따먹자’며 웃으신 일도 있다.

선생님은 사모님께 무척 자상하셨고 집안일도 일일이 세심히 챙기셔서 사모님이 그 자랑을 어머니께 하셨던 모양이다. 집안일에 무덤덤하셨던 아버지는 그로 인해 자주 어머니 원성을 들었고 그때마다 의문의 패배를 맛보곤 하셨다. ‘앞집 이선샘 반만 쫌 해보이소!’ 어머니의 역성이 들린다 싶으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출근길을 서두르셨다.

선생님은 경주의 선생님들 중 가장 많은 주례사를 하신 분이지 싶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잘 난 학생들보다 집안 어렵고 문제성 있는 학생들을 더 챙기셨고 때로는 어려운 제자와 졸업한 여유 있는 제자를 이어주는 가교역할도 하시며 힘든 제자들을 돌보셨다. 그 엄혹하던 독재시절 시국에 대해서도 엄정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편중되지 않은 가치관을 심어주는 선구자이기도 하셨다. 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동문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은 동문들이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추앙한 분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경주고를 은퇴하신 이후에도 한림학교에 진력하시면서 어려운 학생들을 돌보는 일을 오래 더 하셨다. 한때는 본지, 경주신문의 대표이사를 맡아 경주의 참언론을 이끌기도 하셨기에 그 발자취를 아는 나로서는 본지에 몸을 둔 자체로 영광스럽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경주고에 다녔던 나는 운 좋게도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며 내 평생 쓸 글쓰기의 기본을 제대로 익힐 수 있었기에 그 감사함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이종룡 선생님은 우리 앞집에 오래 세 들어 사셨는데 그 주인분이 선생님과 친분이 깊어 수십 년 동안 집세를 올리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그 주인댁 역시 경주최부자 후손이신데 이 역시 최부자댁 후손다운 배려와 아량이었지 싶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두 분 선생님은 내가 교촌에 각별한 향수를 느끼는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신 분이어서 언젠가 이 이야기를 꼭 한번 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경주최부자 이야기의 발판이 두 분 선생님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미어진다.

마침 두 분 모두 이북 출신으로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주을’이 고향이시다. 그 먼 곳을 떠난 두 분 선생님께서 자유와 민주를 찾아 남한으로 오셨고 그 많은 도시 중 경주에, 더구나 교촌에 터 잡고 사신 인연은 경주에나 교촌에나 여간 놀랍고 고마운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역사문화의 산실 경주에, 자손대대로 백성들에게 나눔을 배푼 경주최부자댁 일가들에서 한 분은 경주의 역사문화 발전과 후진 양성을, 또 한 분은 경주의 문학발전과 수 만 명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니 우리 시대 또 다른 경주최부자의 현신이랄 수 있다. 삼가 두 분 선생님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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