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을 지키기 위해 집안 기운을 포기한 문파 선생님

건강한 삶의 이정표

박근영 기자 / 2023년 09월 27일
공유 / URL복사
↑↑ 독립운동가 최완 선생(최준 선생의 아우)댁 뒤로 보이는 보비림 모습

어린 시절 아무 생각없이 쫓아다니던 뒤솔밭이 최부자댁 기운을 북돋우는 보비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보통 어지간한 땅뙈기만 있어도 소나무나 전나무, 잣나무 같은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를 심었음직 한데 보비림에는 활엽수인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주로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보비림으로 괴목을 택한 이유는 침엽수에 비해 화재 가능성이 적고 수종 자체가 웅장하고 커서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소나무 같은 침엽수종은 우리나라 가옥 구조상 중요한 목재로 사용되기 때문에 심어 놨다가 쉽게 베어낼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소나무는 특징상 불붙기 쉬운 나무다. 소나무로 숲을 이루려면 나무와 나무 사이가 가깝게 붙어 있어야 하는데 건조한 시기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들끼리 마찰이 일어나는 정도로도 불이 쉬 나는 나무다. 소나무의 마른 잎사귀들은 ‘깔비’라고 해서 나무를 주로 때던 시절 불쏘시개로 널리 활용되었다. 

기운을 보하는 나무로 심었는데 현실적인 유혹에 의해 쉽게 베어내면 허사가 될 것이고 근처에 많은 인가가 있는데 불이라도 나면 그것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소나무나 전나무, 잣나무 같은 침엽수는 애초에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은행나무 같은 수종도 고려할 만하지만 아무래도 열매가 익을 무렵 냄새가 문제였을 것이다. 게다가 은행나무는 가을에 노란 물이 들어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산의 위용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된 나무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흔히 ‘괴목’이라 부르는 나무들이었을 것이다. 이 두 나무는 높이가 30미터 가깝게 자라고 가지가 넓게 뻗어나가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는 족히 작은 산처럼 보일 만큼 자란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어느 마을이나 동네 어귀에 느티나무를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고 그 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키 크고 가지 넓은 나무가 수십 그루 가지를 맞대고 우거져 있다면 그야말로 산처럼 웅장하게 보일 것이다.

최부자댁 보비림에는 지금도 20수 가까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그러나 이 보비림은 원래 지금보다 훨씬 많은 괴목들이 심어져 있었고 위용 역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다시 보비림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숲에 빈 곳이 많이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된다. 산이 가지런히 이어져 있지 않고 군데군데 허리가 끊어져 있는 듯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최부자댁 기운을 지키던 이 중요한 나무들이 중간중간 베어졌을까?

일제강점기, 대동아공영권 운운하며 한반도 일대와 중국, 필리핀과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 쪽은 물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1941. 12월~ 1945. 8월)까지 일으킨 일본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우리 국민을 괴롭혔다. 이른바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집안의 쇠붙이, 특히 탄피의 재료가 되는 유기에 대해 철저한 수탈을 감행했다. 집안의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과 젓가락조차 남아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노여움은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이 나무들은 대대로 집안의 기운을 지켜온 나무 아닙니까?”

최부자댁 후원의 보비림도 바로 그 공출의 대상으로 들어갔다. 괴목은 목질이 단단하고 나뭇결이 아름다워 가구용으로 많이 쓰이는 장점이 있다. 또 한편으로 나무 자체의 탄성이 좋아 대포의 포신이나 포 운반용 바퀴를 만드는 데 이 괴목이 유용했다. 괴목 공출이 확정되고 나자 군청 관계자들이 뻔질나게 최부자댁을 드나들었다. 

↑↑ 문파 최준 선생님
그러나 당시 가주이셨던 문파 선생님(최준 : 1884-1970)이 이를 쉬 허락할 리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문파 선생님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군청 관계자들은 몸이 달았다. 이에 대해 최염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한다.

“그때 할아버지 노여움은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이 나무들은 그냥 보기 좋자고 심어 놓은 게 아니고 대대로 집안의 기운을 지켜온 나무 아닙니까? 이걸 베어내면 집안의 기운이 절단나는 거라요. 더구나 그 나무가 일본놈들 전쟁치는 대포에 쓰인다 카니 이게 말도 안 되는 기라...! ‘내 죽기 전에는 안 된다’고 한 마디로 잘라 거절하셨지요”

보비림에 대해 회고하는 최염 선생님 얼굴이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상기되셨다.

“그렇게 몇 며칠을 군청 관계자들이 드나들었어요. 그러다 하루는 군청 담당자가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최염 선생님의 주름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최염 선생님이 회고한 군청의 협박은 의외였다.

“참봉 어른, 만약에 이 괴목들을 내주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이 계림의 괴목들을 베어야 합니더. 일본이 계림은 신령한 숲인 걸 알아서 함부로 공출 대상에 넣지 않았는데 참봉 어른이 이렇게 버티시면 계림의 괴목들을 베어가겠다 캅니다”

이 말을 들은 문파 선생님은 깊은 고뇌 끝에 결국 공출에 응하고 말았다.

“계림은 나라의 보배고 우리 숲은 한낱 집안에 딸린 나무일 뿐이다. 우리 집이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계림을 망칠 수는 없지 않겠나!”

당시 문파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는 최염 선생님은 어느새 눈물이 글썽해지셨다. 그 말씀을 들을 때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진한 감동과 함께 소름이 돋음을 느낀다.

결국 그런 이유로 최부자댁 보비림은 반 넘 게 잘려 나갔다. 지금의 보비림이 웅장한 산의 자태를 잃어버린 채 그냥 괴목 많은 숲으로 전락한 데는 바로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

그러나 최부자댁 보비림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6·25전쟁이 지난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또 한 번 잘릴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이 일은 엉뚱하게도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관련되었다. 독자들이 기억하다시피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미상~1593)가 일본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 순절한 것으로 전해진 역사적인 명소다.

6·25로 인해 진주의 촉석루가 폭격으로 불타버린 것을 안 이승만 대통령이 이에 대해 전격 복원을 지시하면서 최부자댁 보비림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공교롭게도 촉석루가 괴목으로 지은 정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일을 맡은 건설사에 이종하 교수란 분이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 일에 적극 개입했다. 이종하 교수는 문파 선생님이 설립한 대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마침 최염 선생님의 대구대 시절 은사님이셔서 최부자댁에 대해 소상히 알았고 자연 최부자댁 후원에 괴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때 이종하 교수는 문파 선생님께 이렇게 청했다.

“참봉어른, 이 나무들이 그냥 이렇게 서 있다가 사라지면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촉석루 짓는 데 쓰이면 대대로 공이 될 게 아닙니까? 더구나 이 나무들을 경주 최부자댁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조상님들을 빛낼 수도 있습니다”

값은 부르는 대로 쳐 줄 테니 촉석루를 짓기 위해 괴목을 내 달라는 이종하 교수에게 문파 선생님은 거꾸로 새로 촉석루를 지을 거면 소나무로 지어라고 훈계하며 이를 끝까지 거절하셨단다.

뒤에 나는 일부러 촉석루에 가 나무를 확인해 보았다. 촉석루는 괴목 아닌 소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결국 괴목을 구하지 못한 건설사는 대통령을 설득해 괴목 대신 소나무로 지은 것이다. 촉석루는 앞에서 말한 대로 6.25때 불탄 것을 1960년에 복원했다. 자칫 최부자댁 괴목들이 목재로 사용되었다면 촉석루는 그 멋을 되찾았을지 모르지만 지금 보는 최부자댁 보비림은 그나마 지금보다 훨씬 옹색해졌을 것이다. 일제의 서슬 푸른 협박에도 굴하지 않다가 계림을 지키기 위해 나무를 내주셨던 문파 선생님의 고뇌를 되새기면 이 숲에 서린 비분강개가 느껴져 새삼 고개를 숙이게 된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