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추사의 경주기행-비문<碑文>을 찾아서

무장사지 풀숲 찾아낸 파편 한 조각
빨랫돌로 사용되던 문무왕 비석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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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머릿돌과 받침돌을 주워 모아 재조성한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시·서·화뿐만 아니라 경학, 불교학, 고증학, 금석학에도 밝아 해동 천재로 불리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멀리 경주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의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경주 김씨의 원류를 찾고 싶었던 걸까? 옛 영화가 사라진 주춧돌만 남은 서라벌 땅에 무슨 까닭으로 두 번이나 찾아왔을까?

1817년 32세 추사는 4월 하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대략 열흘에서 보름 정도 일정으로 경주여행을 시작했다. 오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경주에서 한참이나 멀고 외진 암곡동 골짜기 무장사지였다.

이곳으로 오기 한 해전 친구 김경연과 북한산에 올라 무학대사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을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그의 경주행은 성격상 철저히 준비된 행차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다녀온 뒤 시·서·화는 물론 금석학에 밝은 옹강방과 사제의 연을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활발한 교류를 통해 금석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일찍이 경주 부윤 홍양호가 탁본한 무장사지 비문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 김생의 것이니, 황룡사 스님의 것이니, 김육진의 것이니 등등 화제작이 되었던 것 같다. 김정희도 수소문 끝에 탁본을 구해 그의 스승이기도 한 중국의 옹강방에게 보냈는데 옹강방은 왕희체를 집자(集字)한 글자로 판명했다.

↑↑ 추사가 탁본한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 비편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완벽주의자 추사는 사실 여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장사지의 잡초 우거진 풀숲을 뒤진 끝에 찾아낸 파편 한 조각에 와! 하며 유레카의 순간을 맛보았던 추사, 깐깐하고 흐트러짐이 없던 그가 느낀 감동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느낄 수는 없을까? 억새를 보기 위해 무장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추사의 외마디 환호성을 들려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는 내친김에 사천왕사지와 신문왕릉 일대의 논과 밭을 샅샅이 뒤지며 문무왕 비석을 찾아 나섰다.

돌무더기 속에서 하단을 먼저 찾아내고 우거진 수풀에서 상단을 찾아내었다. 관아까지 고이 모시고 왔지만, 그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00여 년이 지난 뒤 동부동 민가에서 발견되었다.

어느 집 빨랫돌로 사용되어 온 우여곡절을 겪다가 지금은 박물관 신라역사관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 또한 추사가 노력하여 얻은 귀중한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문무왕 비석을 찾는 일은 그가 경주 김씨였고 뿌리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무왕 비문 해독은 경주 김씨와 흉노족 김일제와 연결되는 신라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판도라 상자와 같다.

이와 관련하여 KBS에서 ‘문무왕 비문의 비밀’이라는 프로를 제작 방영하기도 했다. 추사가 문무왕 비문을 해독하였을 당시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궁금하다.

↑↑ 분황사 화쟁국사비 귀부에 새긴 추사 김정희의 글씨(출처: 분황사)

그리고 분황사 인근에서 원효대사 공덕을 기리는 비문 받침돌을 찾아내어 이를 확인하는 글귀 ‘차화쟁국사지비적 추사 김정희(此和靜國師之碑蹟 秋史 金正喜)’라는 글씨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분황사 모전탑 뒤편에 가면 희미하게나마 돌에 새겨진 추사의 글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까닭으로 진흥왕릉을 찾아 나섰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진흥왕릉의 위치를 추사가 몸소 발품을 팔아 확인하였다. 무열왕릉 뒤쪽 숲에 진흥왕릉뿐만 아니라 진지왕을 비롯한 4개의 왕릉이 있음을 밝혀냈다. 지금은 서악동 뒷산 일대가 잘 정비되어 공원화되어 있는 것은 지금 사람들의 공로이겠지만 추사의 공도 적지 않다.

1824년 39세 나이에 추사는 두 번째로 경주를 찾았다. 남산기슭 창림사지에 왔던 것을 보면 신라 명필 김생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창림사지 비문을 신라의 김생이 썼기 때문이다. 추사가 방문하였을 때 이미 절은 폐사되었고 탑은 사리장엄구를 얻고자 하는 도굴꾼들에 의해 무너진 상태였다.

폐허에서 김생의 글자 한 조각 파편을 찾고자 했다. 무장사지에서 느꼈던 큰 기쁨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일제 강점기 서악동 고분군, 진흥왕릉(출처: 한민족백과사전)

경주에서 가장 쉽게 추사체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을 중건하면서 헌종이 사액 현판을 내려주는 과정에서 이를 추사에게 쓰게 하였다.

남산기슭 옥룡암에는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는 추사의 현판이 있다. 일로향각 현판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해남 대흥사에서 쓴 기록이 있다. 경주와 가까운은해사와 통도사에도 있지만 옥룡암의 것은 모각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추사의 글씨는 서원뿐만 아니라 사찰에서까지 유행이었고 너도나도 따라 쓴 필사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자 같은 추사가 여러 번 경주에 왔거나 몇 해를 더 머물렀다면 찾아낸 비문 해독은 그 수가 훨씬 많았을 것이며 금석학 영역도 한층 넓어졌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동서남북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닌 노력이 빚어낸 결과의 산물임에 더더욱 경외심이 든다.

경주에서 틈틈이 추사의 행적을 찾아보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추사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고, 역사가 보이고, 전후좌우가 보인다.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배지에서 그린 세한도가 그러하고, 일천 자루의 붓이 몽당붓이 되기까지 피와 땀이 베인 추사체가 그러하다. 깨어진 비문 한 조각을 찾으러 멀고 먼 길 걸어온 한 사내의 발걸음이 공룡발자국보다 크게 가슴속으로 걸어드는 듯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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