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에는 헤임달의 바이프로스트, 웜홀이 있다??

집안의 급한 일 전하기 위한 ‘쪽문’

박근영 기자 / 2023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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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웜홀 이론을 설명하는 그림

내가 교촌에 살았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아주 큰 혜택이었다. 더구나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달리 사물이나 현상에 호기심이 많았던 데다 탐구심까지 강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교촌과 최부자댁에 대한 많은 의문들을 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그게 내가 최부자 관련 책을 쓰면서 귀중한 자양분이 되어 준 것도 사실이다. 내가 혼신을 기울여 쓴 책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는 어쩌면 그런 호기심과 탐구의 결과일 것이다.

그 호기심과 탐구가 4년 가깝게 최부자댁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을 모시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들은 동력이었다. 그 질문과 대답의 기간 동안 최염 선생님이 가장 자주 하신 말씀 중의 하나가 “아니, 그런 걸 다 물어보는가?”였고, 그런 다음에는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네!”라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이를테면 선생님 기억 속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기억의 어느 구석에 갈무리하신 채 잊어버리신 옛날 이야기들을 내가 하나씩 하나씩 찾아서 기억 밖으로 꺼내드리는 작업을 한 셈이다.


↑↑ 웜홀1


토르에 나오는 바이프로스트가 교촌의 곳곳에 널려 있다니, 믿을 수 있는 말인가?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교촌에만 있는 최부자댁 ‘웜홀(worm hole)’이다. 독자들은 전통적인 한옥 마을에 웜홀이 있다고 하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의아해하실 것이다. 웜홀은 우주현상을 말할 때의 용어로 빛의 속도 보다 빠르게 우주의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최단 거리를 말한다. 인기 마블 SF영화 중 하나인 ‘토르’에 보면 우주의 중심 아스가르드의 관문을 지키는 헤임달이 ‘바이프로스트(Bifrost)’라는 다리를 만들어 아스가르드와 다른 우주 공간을 연결시키고 그 다리를 통해 순식간에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바이프로스트 역시 웜홀의 한 가지인 셈이다. 조금 전문적으로 말하면 웜홀은 우주가 우리가 평범하게 알고 있는 3차원적인 평면이나 공간의 기준에 있지 않고 불특정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가정에서 성립하는 이동 통로다.

기왕 웜홀 이야기가 나온 걸음에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막대 고무풍선을 둥그렇게 말아서 끝과 끝을 서로 마주 보게 해 두었다면 우리가 아는 일상의 우주는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가기 위해 한 방향, 이 고무풍선에서 본다면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가기 위해 화살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웜홀은 a와 b 사이인 c 지점만 건너뛰면 된다. 때문에 아무리 멀리 있는 곳이라도 웜홀을 통하면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웜홀이 한옥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마을 교촌에 있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황당무계한 말인가?

그러나 실제로 교촌에는 웜홀이 있다. 그것도 교촌의 오래된 기와집들의 집집마다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과 통한 작은 아버지댁 뒷담에 나 있는 쪽문을 통해 자주 뒤솔밭으로 다녔다. 이 쪽문을 열고 나가면 뒤솔밭으로 가는데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대문을 열고 동네를 돌아 뒤솔밭으로 가려면 최소한 5~6분은 걸렸다. 이런 쪽문이 우리 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네 큰 기와집들에는 어김없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응당 옛날 큰 기와집에는 뒤로 통하는 쪽문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한옥 마을을 방문해 보니 쪽문이 이렇게 일괄적으로 달린 마을이 한 곳도 없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안동이나 강릉의 큰 기와집들도 유심히 살펴본 바 이런 쪽문이 달린 곳이 없었다. 심지어 경주의 큰 기와집들을 둘러봐도 집 밖으로 난 쪽문을 달고 있는 한옥은 없었다. 내가 불민해 쪽문 있는 집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쪽문을 둔 집이 없었고 집들이 이렇게 일괄적으로 쪽문을 가지고 있는 마을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었다.

↑↑ 웜홀2

이 쪽문에 대해 최염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최염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셨다.

“그건..., 친척들이 빨리 모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문이었지. 무슨 회의를 하거나 급히 전할 일이 있으면 그 쪽문으로 나다니면 쉽지 않았겠나?”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 쪽문들이 웜홀의 기능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최염 선생님은 그런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이셨는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되물어보셨다. 내가 그 쪽문이 경주 교촌에만 있는 ‘웜홀’이라 말씀드렸더니 재미있는 비유라며 허허 웃으셨다.

지금까지 다소 우스개처럼 말했지만 이 쪽문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게 볼 수 있다. 먼저 최염 선생님 말씀처럼 이 문은 집안의 급한 일을 전하기 위한 최단거리 웜홀이라는 점에서 교촌의 기와집들이 모두 최부자댁 가솔들이 살았다는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점이다. 이미 몇 차례 언급했듯 교촌의 오랜 기와집들은 모두 최부자댁 나름의 댁호가 붙어 있을 만큼 어느 집 하나 빼놓지 않고 최부자댁 가족과 친인척들이 모여 살았다. 집과 집이 남이 아니고 언제건 드나들 수 있는 가족이고 친척이니 서로 왕래하기 편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 쪽문이었던 것이다. 만약 최부자댁 본가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이런 쪽문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쪽문 하나만 봐도 교촌 전체가 최부자댁이었다는 말이 성립한다.


↑↑ 웜홀3


최부자댁의 실용성을 보여주는 쪽문은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신비의 문이다.

또 하나 중요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최부자댁 사람들이 얼마나 실용적으로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한옥을 관심 가지고 둘러보면 알겠지만 어지간히 큰 집이라도 담을 헐고 담 뒤나 옆에 쪽문을 만드는 일은 흔치 않다. 담을 헐어 문을 낸다는 것 자체가 꺼리는 일이기도 하고 보안상의 문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불편해도 돌아서 다니면 그뿐, 굳이 문까지 내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대문을 나와 길을 돌아다닌다고 가정한다면 대가족이 어울려 살고 가복들까지 드나드는 와중에 그 많은 식솔들이 겪는 불편들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쪽문은 대문이 남쪽으로 트인 곳은 동쪽이나 서쪽 혹은 북쪽으로, 대문이 서쪽으로 트인 곳은 북쪽이나 동쪽으로 나와 있는 등 편의에 맞게 뚫어놓았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러니 이 쪽문이 있음으로 해서 절약되는 이동 시간의 총합은 어마어마하지 않았을까?

지난번 경주에 갔을 때 일부러 이 쪽문들을 둘러보았다. 몇 군데 집의 쪽문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곳곳에 쪽문, 그 나지막하고 좁은 웜홀들이 남아 있어서 적잖이 반가웠다. 빛바랜 작은 문으로 200년 넘게 드나들었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빨리 감기’로 머릿속에 감아 보았다. 아마 수백만 번의 왕래가 이 작은 문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이 쪽문을 통해 어쩌면 조선 후기의 내로라 하는 유생들과 전국의 이름 높은 과객들이 드나들었을 것이고 또 어쩌면 독립운동하던 열사들도 몰래 드나들었을지 모른다. 그런 한편으론 대문으로 드나들기 어렵거나 민망한 일들이 이 문을 통해 이루어지지도 않았을까? 이쯤 생각하니 쪽문이 그냥 쪽문이 아니고 엄청난 비밀을 품은 신비한 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살던 구새댁, 우리집은 오래전의 위용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고 작은 아버지댁은 집 주인이 오래 비워둔 탓인지 마당에 풀이 우거지고 집도 조금 내려앉아 예전의 위용을 찾아보기 어려워 안타까웠다. 한옥은 아무리 고대광실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주저앉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크고 위용 있던 집이 옹색하게 퇴락하는 모습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SF영화 토르에 나오는 바이프로스트는 세상의 종말, 나그나로크를 겪으면서 사라졌다. 그 덕분에 토르는 먼 길을 갈 때마다 수고스럽게 묠니르 망치를 휘둘러서 날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다행히 지금도 교촌의 웜홀, 최부자댁 바이프로스트는 곳곳에 남아 있다. 세상 바람들이 그것을 몰라보는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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