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과 금강산[2] 이차돈 순교비엔 ‘그날의 사건’ 오롯이

이차돈 죽음 앞 부처의 위신력 받들어
신라, 불교통해 삼국통일 위업 달성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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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돈순교비는 모두 6면으로 구성돼 있다. 제1면에는 이차돈 순교 장면을 음각으로 새겼고 제2면부터 제6면까지는 글자를 새겼다. 사진 속 순교비 오른쪽 면이 순교 장면을 새긴 제1면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이 전하는 이차돈 순교 이야기는 디테일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야기 전반의 내용은 비슷하다. 아래는 옛 문헌을 참고해 구성한 ‘이차돈의 순교’ 과정이다.


죽음 앞 당당했던 이차돈의 순교

527년 법흥왕(재위 514~540)이 불교를 받아들일 작정으로 첫 번째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소 신료가 벌떼처럼 일어나 반기를 들었다.

임금이 “나와 동반할 자가 누구냐”고 탄식하자 손들고 나선 이가 있었다.

법흥왕의 측근인 사인(17관등 중 12~13등) 염촉(이차돈)이었다.

당시 22살(혹은 26살)이었던 염촉은 “‘왕명을 잘못 전했다’고 꾸짖고 신의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복종할 것”이라며 순교를 자처했다.

물론 법흥왕은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염촉은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대는 베옷을 입었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

법흥왕은 무장한 무사들을 사방에 배치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대소 신료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너희는 내가 불법을 믿으려 사찰을 짓는다고 여겨 반역을 꾀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이에 대소신료들은 “절대 반역할 뜻이 없다”고 앞 다퉈 맹세했다.

이 대목에서 문헌의 기록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삼국유사’는 “‘사찰을 조성하라’는 왕명을 고의로 늦춰 전달했다’는 이유로 염촉의 책임을 물었다”고 전한다. 반면, ‘삼국사기’는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염촉과 절대 안 된다는 신료들 사이에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법흥왕이 고심 끝에 염촉에게 죄를 묻는 모양새를 갖췄다”고 했다. ‘해동고승전’은 “염촉이 극렬하게 반대하는 대소신료 앞에서 ‘왕명을 사칭해서 사찰을 지었다’는 죄목을 자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화의 근원으로 지목된 염촉이 끌려 나왔다. 사형집행관이 모자를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참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염촉이 심상치 않은 유언을 남긴다.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과연 그랬다. 염촉의 목이 떨어지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여섯 번이나 흔들렸다.

기록 속 이차돈 순교 과정이다. 기세등등하던 귀족들도 목에서 솟구친 흰 피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모두가 이차돈의 죽음 앞에서 부처의 위신력(威神力)에 허리를 숙였다.

이처럼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라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됐다. 이차돈 순교 7년 뒤인 534년(법흥왕 21)에는 천경림에 신라 최초 공인 사찰인 흥륜사 불사가 재개됐고 10년 뒤인 544년(진흥왕 5)에 이르러서 마침내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신라는 불교를 통해 백성들 염원을 하나로 모으고 그 힘을 기반으로 다시 삼국통일의 위업까지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게 후대의 평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차돈에 대한 기억은 대중에게서 점점 사그라졌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차돈이 순교한지 290여년이 지난 헌덕왕(재위 809~826) 대에 이차돈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생긴다.

이차돈 순교 덕분에 조성된 흥륜사에서는 10명의 불교 성인 인물상을 흙으로 빚어 금당에 모셨다. 이들은 동서나 5명씩 나누어 배차되었는데 이차돈은 유일하게 승려가 아니었음에도 아도·혜숙·안함·의상 등 여러 고승과 함께 나란히 동쪽에 당당하게 자리했다.

흥륜사에서는 또, 매달 5일 신도들이 모여 이차돈을 기리는 법회를 열었다.

817년과 818년 사이에는 대대적인 이차돈 추모 이벤트가 펼쳐졌다.
불교 승직 중 최고위직인 국통 혜륭 등 불교계 고위 인사를 총동원해 이차돈의 옛 무덤을 고치고 그 앞에 큰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이차돈순교비’다.

‘이차돈순교비’ 끝부분엔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등장한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즉위 2년인 766년의 일이다.

한 무덤에서 유혼(幼魂, 어린 혼백)이 나타났다. 노백(老魄, 늙은 혼백)이 ‘마치 꿈에 본 내 아들의 혼 같다’며 조문했다. 그러자 유혼은 ‘옛날에 어떤 왕이 불법을 일으키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소. 나는 염촉(이차돈)이오’라고 했다.

순교한 지 200여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잊힌 존재가 된 이차돈의 혼백이 세상에 나타나 ‘나를 잊었냐’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향후 나라 안에서 이차돈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고 마침내 순교비까지 건립된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 20세기 초 발견 당시 ‘이차돈순교비’ 모습. <제공: 문화재청>


순교비엔 ‘그날의 사건’ 오롯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순교비’엔 이 같은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담겨 있다. 특히 이 비석은 무엇보다 이차돈 순교와 관련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뒷날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다른 사료에 비해 이 비석은 818년 신라인에 의해 제작돼 세워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테면 ‘흰 피가 솟았다’, ‘꽃비가 내렸다’ 등의 이야기가 먼 훗날 가공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신라인들이 수백 년 동안 이차돈의 순교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순교 중 흰 젖이 솟구치는 장면을 비석 한 면에 조각(부조)로 표현한 것도 이 비석의 독창적인 부분이다. 부조로 새겨진 이차돈의 옷 역시 신라시대 복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극심한 마멸 때문에 읽어낼 수 있는 글자가 너무 적다는 게 ‘이차돈순교비’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차돈 순교의 전모를 밝힌 이 비석의 대략적인 내용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의 내용 속에 인용돼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교비’의 명문이 잘 보일 때 뜬 탁본을 토대로 내용을 베껴 목판본으로 찍어낸 서첩(書帖, 글씨첩)도 몇몇 남아 있다. 학계에서는 이 같은 탁본 자료와 글씨첩, ‘삼국유사’ 등의 2차 사료 등을 참고해 순교비 명문을 ‘추정 판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차돈순교비’와 관련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2023년 8월 1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차돈순교비’를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분석한 최신 성과를 공개한 것이다. 비문을 RTI 촬영으로 읽어낸 새로운 판독문이었다.

‘RTI’(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는 360도 각도에서 빛을 쏜 뒤 글자가 가장 잘 보이는 순간을 읽어내는 첨단 판독 기법이다. 그 결과 79자를 새롭게 판독해내고, 그동안 형태를 잘못 표기했거나(오기, 誤記) 다른 글자로 잘못 읽은(오독, 誤讀) 64자를 고칠 수 있었다. 이로써 총 875자(7행 25줄, 총 5면) 가운데 새로 읽어낸 79자를 포함해 73.4%인 642자를 판독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번 판독의 핵심은 비문의 첫머리에 해당되는 ‘건립연대’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순교비의 건립연대는 ‘원화 13년(818) 무술 8월’로 알려져 있었다. 마멸이 심해지기 이전의 탁본자료를 판각한 ‘원화첩’ 등이 소개한 연대였다.

하지만 마멸이 심한 순교비 실물에서는 ‘원화 13년’이란 구절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 RTI 판독을 통해 비석의 둘째 면 맨 오른쪽 행 중간 부분에서 ‘십삼’(十三)이란 글자가 보였던 것이다.

‘원화 13년’이 적힌 비석 둘째 면 맨 첫 글자(비문의 맨 첫 글자, 비석 첫째 면은 조각 기법으로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음)도 분명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규장각본 등에선 ‘위’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번 RTI로 읽어낸 비문의 첫 단어는 ‘염’(猒)이었다.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글자는 ‘촉’(觸), ‘염촉’은 이차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번 판독을 통해 ‘위촉’을 ‘염촉’으로 고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문 첫 두 글자 ‘염촉’ 뒤 한 글자 건너 ‘당기’(幢記)란 글자도 확인했다. ‘이차돈순교비’는 다른 이름으로 ‘백률사석당기’(石幢記)라고도 불려왔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염촉□당기’의 ‘□’는 ‘석’(石)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猒觸□幢記□□□□□□□□□□元和十三秊戊戌八月日佛….

‘염촉□당기 원화 13년(818년, 헌덕왕13) 무술 8월 일에 부처가….’ 이번 RTI 판독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이차돈순교비’ 머리글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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