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주차장으로 변한 최부자댁 과수원

볏단으로 물물교환 했던 사과

박근영 기자 / 2023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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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염 선생님이 직접 가꾼 과수원, 사진에서 월정교 앞쪽과 재매정 앞쪽까지가 모두 과수원이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교촌 남쪽, 남천을 건너면 ‘일정로’를 따라 넓은 사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근래 재건된 월정교가 시작되는 부근부터 김유신 장군의 유택지로 알려진 재매정 맞은 편까지 약 300미터 거리의 거리가 온통 과수원이었다. 폭도 넓어 6~70미터는 족히 되는 과수원은 교촌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큰 과수원이었다. 평수로 치면 만 평은 족히 될 이 넓은 과수원은 도중에 천원동으로 난 좁은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었고 관리하는 주인도 따로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이 과수원은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풋사과부터 익은 사과까지 언제나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친근한 과수원이었다. 사과를 먹으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한데 우리는 굳이 돈을 내지 않고도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 볏단으로 사과를 바꾸어준 주인들의 속내는 사과 서리를 막기 위한 비책이었다.

과수원 주변 동쪽과 서쪽은 논과 밭이었다. 밭에는 보리가 심어졌고 논에는 벼가 심어졌을 것이 당연했다. 남천변에는 관리소홀을 틈타 지대가 높은 곳에는 작은 논과 밭도 만들어져 있었다. 이들 논밭의 주인들은 추수 후 알곡을 털어낸 볏단을 논이나 밭 가운데 쌓아 두었다. 이렇게 볏단을 쌓아 두는 것은 볏단을 삭여 소에게 먹이거나 이듬해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볏단을 쌓아 둔 것을 노적가리라 하는데 이런 노적가리들이 그때는 논이나 밭에 드문드문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이런 노적가리에서 볏단을 몇 개 뽑아 과수원에 가져다 주었다. 그럼 과수원 주인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사과를 내주었다. 그런데 이때 내주는 사과는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멍이 들었거나 한쪽이 곪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 사과들을 한 보시기 가져와 곪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집에 들고 갈 것도 없이 그냥 남천물에 설렁설렁 씻어 먹기도 했다. 그 사과들이 정상적으로 파는 사과가 아니라 낙과(落果)라는 것은 아이들도 알았다. 버리거나 거름으로 쓸 사과를 아이들이 들고 오는 볏단을 핑계로 대충 내주는 것이었다. 사방에 볏단은 널려 있었고 사과는 언제나 자연적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썩은 사과를 도려내는 약간의 수고만으로 언제나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성한 사과가 먹고 싶었던 아이들은 몰래 사과서리를 감행하는 대범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수원은 전체가 탱자나무로 둘러져 있었다. 탱자나무는 뾰족한 가시가 사방으로 돋아난 매우 성가신 나무다. 키도 커서, 높이 올라가는 탱자나무는 4미터 넘게 가지를 뻗어올렸다. 때문에 과수원 사과를 서리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과수원에는 사나운 개들도 지키고 있었다. 개들은 과수원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면 컹컹 소리를 내며 짖었고 아이들이 과수원 주위로 몰려다녀도 여지없이 큰 소리로 짖었다.

그래도 탱자나무에는 허점이 있었다. 탱자나무 아래쪽 둥치가 한창 굵어지는 쪽에는 좁은 개구멍이 만들어질 정도의 빈 공간이 생기곤 했는데 이 좁은 공간으로 덩치 작은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 그런 공간으로 사과 서리를 하고 나면 과수원 주인은 잽싸게 철조망을 엮어 그 공간을 막아두곤 했다.

뒤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 과수원에 정식으로 사과를 사러 간 적 있었는데 그때 주인 아저씨에게 어릴 때 볏단으로 사과 바꾸어 먹던 이야기를 했다. 그 즈음에는 볏단으로 사과 바꾸어 먹는 아이들이 없을 때인데 그런 기억을 들려주자 주인 아저씨가 큰 소리로 웃으며 그게 사실은 아이들이 사과 서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먹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과수원은 아이들이 눈독 들이기 딱 좋은 먹거리였으니 자칫 그런 욕구를 적절히 처리해 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도둑으로 만들 수 있었고 낙과는 언제나 생기니 과수원 주인이 볏단 받은 것을 핑계로 아이들에게 사과를 내준 것이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추억을 안고 있는 과수원이 실상은 최부자댁에서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책을 쓰면서였다. 과수원 이야기는 최부자댁이 중점적으로 생산하던 특산물에 대해 최염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던 중 드러난 뜻밖의 사실이었다. 뒤에 상세하게 말하겠지만 최부자댁 특산품에는 남산돌안경과 한지를 중심으로 가내에 쓰기 위한 다양한 산물들이 있었다. 그런데 과수원은 이전의 선대 최부자 어른들이 아니고 최염 선생님의 할어버지, 즉 마지막 경주최부자이신 최준 선생님이 젊은 시절부터 직접 일군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과수원은 6.25 전쟁 와중에 관리인들마저 피난 가버린 통에 관리가 되지 않아 못 쓰게 된 것을 최염 선생님이 작심하고 손수 다시 일군 것이기도 했다.

“아니, 회장님이 손수 그 넓은 과수원을 다시 일구셨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의외의 말씀에 최염 선생님은 허허 웃으셨다.

“정말 내가 만들었지. 그때 고생 참 많이 했다네!”

최염 선생님 말씀인즉 과수원을 다시 일군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관리가 되지 않던 과수원을 아버지께서 팔아버릴 것 같아 할아버지 정성이 서린 과수원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는 것이 하나였다. 그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귀하게 자랐어. 누구나 다 아는 부잣집 주손으로 태어나 아무런 고생을 해보지 않았지. 심지어 6.25로 친구들은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동안 나는 후방에서 경찰서장의 비서로 지내면서 목숨도 몸도 다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거든. 그런 나 스스로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시키고 싶었네....”



“똥물을 입찰받아 소달구지에 실어와서는 과수원에 뿌렸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시키고 싶었어...!”

최염 선생님은 그런 결심을 한 후로 그 넓은 과수원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기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노라 회고하셨다. 만석군의 손자로 태어나 굳은일이라고는 털끝만큼도 해보지 않았으니 농사에 관한 한 눈뜬 봉사와 마찬가지였을 선생님이었다. 다행히 오래 전부터 과수원을 돌보던 일꾼 한 사람을 찾은 선생님은 아침 일찍 소달구지에 똥물까지 실어 나르고 과수원에 따로 만들어둔 똥물 저장고에 옮기고 이것을 밭에 뿌리는 고생을 철마다 되풀이하셨다.

“그때는 똥물도 귀한 자원이라 이걸 입찰을 붙여서 사와야 했다네. 월성초등학교가 학생수가 많아 그때 똥물이 많이 나왔어요. 그걸 내가 직접 입찰해서 퍼왔다오!”

똥물은 보통 새벽녘에 퍼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새벽 3~4시에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쑤어 먹여야 했단다. 똥물을 운반하러 가는 길에 아침 일찍 일 나가는 인부들을 위해 여는 선술집이 있었는데 매일 막걸리 한두 잔으로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그 집을 들러다보니 선생님을 향해 인부들이 ‘최농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최염 선생님은 당신께서 손수 탱자나무를 심은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과수원에는 사과나무가 대부분이고 드문드문 복숭아, 자두 같은 것도 심었어. 그런데 이게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산짐승들이 몰려 내려오는 거라. 맷돼지, 노루, 고라니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내려왔어. 이놈들이 열매만 따먹는 게 아니라 나무껍질을 통째 갉아먹고 뿌리를 파 뒤집어버리는 거라. 결국 그놈들 막느라 탱자나무를 심었지. 그래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놈들이 많아 철조망도 두르게 되었고. 그 작업하면서 손 많이 찔렸지”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최염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큰 감동을 느꼈다. 특히 재벌 2세나 3세들의 옳지 못한 일들과 이른바 금수저 집안의 갑질을 대하면 선생님의 젊은 시절 발심이야말로 경주최부자댁의 오랜 정신이란 생각에 새삼스러운 경외심을 가지곤 한다.

아쉽게도 지금 그 과수원은 사라지고 없다. 무수한 사과가 열리던 과수원은 지금은 월정교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과 일반적인 밭, 일부 음식점 건물 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교촌에 들러 이 길을 걷거나 차로 지나다 보면 그 울창했던 과수원과 탱자나무 위로 눈부시게 피어 있던 아카시아꽃들이 문득 떠오른다. 그것이 경주최부자댁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과수원과 함께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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