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박수근 그림과 경주 그리고 계림

박수근 그림, 경주를 떼고 말할 수 없어
석조 문화재 와당과의 교감 통해 고유 그림 창조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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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근의 스케치와 박수근 나무 (제공: 최용대 화가)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그림 속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쁘고 젊은 여인은 없고 수수한 시골 아낙네, 꼭 중년의 우리 엄마 같다. 먹고살기 위해 장터와 길거리 그리고 빨래터에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들 때문일까? 소박한 일상을 그렸던 그를 서민 화가로 부르기도 했지만, 생존 당시와는 달리 그의 그림은 국내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 그의 작품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에 낙찰되었다. 20호(37*72)짜리 소품의 그림치곤 엄청난 금액이다. 대작 그림을 그릴 형편이 못 되었기에 그의 작품은 소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화가와 경주는 직접적 인연이나 연결고리는 없지만, 그의 그림은 경주를 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칠고 꺼칠꺼칠한 박수근 화가만의 특유한 그림의 비밀이 경주와 밀접하게 관련있기 때문이다. 흔히 ‘박수근표 질감’이라고 부르는 그의 마티에르는 경주의 화강암 석불과 한통속이라 할만하다. 화가는 틈나는 대로 고도 경주를 찾았다. 20대 후반에 판화에 관심 있는 국내 독학파 ‘주호회’를 조직하여 경주 남산과 신라석물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얻어낸 것이 바로 박수근표 질감이다.

↑↑ 박수근의 작품 <나목>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토속적 미감과 질감들이 바로 경주의 회백색 화강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과 백, 회색 톤의 색감, 우들두들한 질감,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대상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한 것과 생략된 배경들이 경주에 산재한 화강암 마애불 조각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이 없는 대신 경주의 마애불을 비롯한 화강암 조각상들이 그의 스승이었는지 모른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는 경주의 석탑과 마애불 등 석조 문화재 그리고 와당과의 교감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그림을 창조해 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과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고 그것을 조형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돌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잘 드러난 화가의 노트에 있는 글이다. 특히 화가가 경주의 화강암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박수근의 최고 후원자이기도 한 미국의 마가렛 밀러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제가 경주에 갔을 때 석 조각에서 탁본으로 찍은 것으로 동양 표구로 꾸며서 보내려고 했으나 저의 사정으로 선편으로 보내드리게 되어 봄에나 받아보시게 된 것을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저희 마음의 표시입니다”

↑↑ 박수근 귀면화 탁본
이처럼 자주 경주를 찾아 석물과 와당을 탁본했다. 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 임신서기석, 석굴암 등을 비롯하여 문화재를 답사하며 신라의 문화와 작품에 몰두하였음은 가족들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경주 남산을 오르내리며 바위 속 마애불을 답사하여 거친 표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촉감의 느꼈기에 그 질감의 느낌을 그림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얼마나 화강암을 좋아했는지는 여기저기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호는 다름아닌 ‘미석美石’이다. ‘아름다운 돌’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몇 해 전 방문했던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의 외형도 평소 좋아했던 화강석으로 건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수근 화가은 생전에 자신의 예술적 모태가 ‘신라의 석조 문화’라고 거듭 말한 바 있다.

박수근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탁본 59점 가운데 80%가 와당 탁본이다. 중국 와당 두 점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의 와당을 탁본한 것들이다. 연화문, 당초문, 인동문 등 신라 와당의 여러 문양과 선은 그의 그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 화가들이 유학 가서 서양 화풍에 쏠려 있을 때 흙수저였던 그는 고유의 우리 전통미술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예술혼을 찾아내었다.

↑↑ 박수근 나무(2023년 10월 현재)

2013년 지역의 어느 신문사에 기고한 최용대 화가의 말을 빌리자면 계림에는 ‘박수근 나무’로 불리는 나무가 있는데 주로 경주지역 화가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특이한 형태의 나무가 1956년 박수근이 스케치한 그림이 있고 지금 계림에도 그 나무가 있다. 이와 관련된 오래된 기사를 스크랩해 둔 것을 들고 두 번이나 방문한 끝에 어렵사리 그 나무는 찾아내어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박수근 나무 사진 참조)

비록 부목 받침대를 하여 지팡이 짚고 있는 노인 같은 모습이었지만, 나무는 여전히 푸르게 계림 한쪽을 지키며 서 있었다. 최용대 화가의 말씀처럼 ‘박수근 나무’라는 이름표 하나 달아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숲, 한때는 신라의 별칭으로도 까지 불렸던 유서 깊은 계림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포토존이 생겨나는 것은 충분히 즐거운 일 아닐까?

박수근 화가가 스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계림의 나무 외에도 이곳에서 사생대회에 참가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두 여고생을 스케치한 작품을 비롯하여 계림과 관련된 작품이 여러 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가는 50년 후반과 60년대 초 신라문화제 사생대회 심사위원으로 여러 번 참석하였기에 가능한 그림들이다. 이외에도 경주에서 스케치한 것으로 유추할 작품이 여러 점 있지만 확증할 수가 없는 아쉬움이 크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어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증언해 줄 지역의 원로분들 마저 사라지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저런 인연이 닿았기 때문일까? 지방 도시로는 드물게 박수근 화가의 작품은 2013년 우양미술관과 2017년도 솔거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만큼 사후에도 경주와의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 박수근의 작품 <금강역사>

박수근 화가의 그림의 주된 소재인 여인네 말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잎 하나 달지 않은 발가벗은 나목이다. 늦깍이 소설가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도 박수근 화가와 그림과 관계가 깊다. 두 사람은 미군 부대 PX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다. 그곳에서 박수근은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고, 박완서는 경리 일을 맡고 있던 평범한 일상적 삶을 살던 두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와 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봄을 기다리는 나목과도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타고난 천재성보다는 끝없는 노력으로 일구어낸 대기만성형의 작가들이기에 더 뜨겁게 박수를 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박수근 그림 속의 나목들은 모두 계림의 나무를 닮은듯하다. 계림의 나무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림 속으로 걸어 든 것 같기도 하다. 그 옛날처럼 해마다 이곳에서 ‘박수근 그림 그리기 대회’라도 개최하면 참 좋겠다. 계림은 그림으로 새로 태어나는 숲이 될 것 같다. 신화와 설화가 있고 근·현대의 스토리텔링이 공존하는 숲에서 세계적 거장의 그림이 태어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지나간 과거는 단지 사라지지만은 않는다. 과거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전인식 시인(시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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