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라는 걸림돌을 ‘상생’이라는 디딤돌로

집안의 급한 일 전하기 위한 ‘쪽문’

박근영 기자 / 2023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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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향교 대성전 모습.

“아버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집터를 깎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기둥을 깎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많은 기둥들을 어떻게 일일이 두 자씩 깎는다는 말입니까?”

“어허~~! 그쯤은 해야 유림들이 우리 성의를 받아들일 것 아니겠느냐? 땅을 깎는 것은 달리 쓸 곳이 있으니 염려 말고 기둥을 깎는 일은 기왕에 집을 뜯어 옮기는 마당이니 조금 더 신경을 쓰면 되겠지. 그보다 너는 유림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의중을 살피는 일에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해라”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원동력은 다름 아닌 교육열, 향교는 공교육의 현장

경주최부자댁은 알다시피 교촌에 있다. 이 교촌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향교’에서 왔다. 전국적으로 교촌 혹은 교동, 교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많은데 그 유래 역시 향교가 있는 동리의 대명사다.

향교(鄕校)는 고려 시대부터 있던 지방의 공교육 기관으로 본격으로 전국에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유학의 진흥을 위해 이루어졌다.

향교가 전국의 주·부·군·현에 고르게 배치된 것은 성종대인데 이때 향교의 재정 지원과 교수(敎授)의 임명 등에 대한 뚜렷한 원칙이 생겼다. 당시 군현만 해도 무려 330개소에 달하였으니 주와 부를 합하면 360개 소에 이르는 광범위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향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전문서나 자료에서 보면 될 것이지만 이 장에서 최부자댁과 상관없이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 하며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지만 기자는 다른 나라와 확연히 다른 ‘교육’열에 있다고 믿는다. 현명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많은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에 비해 잘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 교육의 중심에 국립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은 동시대 어떤 나라보다 교육이 장려되는 나라였다. 위에서 말했듯 전국적으로 향교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지방 사립 대학격인 서원(書院)이 있었고 이와 유사한 사우(祠宇)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47개소의 서원을 남겨두고 철폐하기 바로 전까지 전국에는 무려 1000여개의 서원과 사우가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립학교가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초보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서당이 어지간한 마을마다 있었으니 이런 광범위한 교육환경은 동시대 어느 나라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서원이 저지른 패악이나 그것을 기반으로 한 양반 토호들의 문란은 부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배움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우리나라처럼 뿌리 깊게 내린 조선은 언제라도 비상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교육열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6.25 이후에는 폐허가 된 나라를 초현대식으로 건설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국민, 문맹률이 어느 나라보다 낮은 나라가 효과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민주주의 역사가 짧으면서도 훨씬 빨리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교육의 탁월성에서 찾을 수 있다. 무식하고 무지한 나라는 왕정이나 독재의 기간도 길다. 교육은 자의식을 일깨우는 가장 적절한 수단인데 자의식을 가진 국민이 자신을 억누르는 독재를 가만두지 않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이 당연한 이치를 정치인들만 제대로 몰라 섣불리 국민을 기만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개돼지가 아닌 이상, 더군다나 절대다수 국민이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정치권력이 멋대로 휘두르는 대로 휘둘릴 리 없다. 교육 수준 높은 국민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향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잡설이 길었다. 그렇다면 향교가 왜 최부자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최부자댁이 내남면 이조리에서 교촌으로 오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원래 최부자댁은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의 집이었으나 교촌으로 오면서 그 규모도 줄었다. 그 이유가 향교 때문이었다.



과객 많기로 소문난 최부자댁이 교촌에 온다면 면학분위기도 망가지고 오물도 많아지지 않을까?

최부자댁이 교촌으로 옮겨온 것을 최부자 가문에서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으로부터 8대, 부자로 알려진 최군선 공으로부터 6대인 최기영 공(1768~1834)대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사를 논의하고 완료 것이 최기영 공이 20대 초반인 1792년인 것으로 미루어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기영 공의 아버지인 최언경 공(1743~1804)이 건장하던 때였기에 이사한 주체가 최언경 공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최기영 공이 이사했다고 하는 이유는 이때 이미 가문의 대표 자격을 최기영 공에게 넘겼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도 19세에 아버지로부터 가권을 넘겨받았는데 이렇게 젊은 시절에 가문의 주도자가 되는 것도 최부자 가문의 특색으로 보인다.

교촌으로 이전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무렵 부의 규모가 커져 더 이상 이조리에서 관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최언경 공부터 최기영 공까지는 조선의 제2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영조~정조 시대를 관통하던 때다.
사람들의 왕래도 어느 때보다 잦던 때였고 실사구시 학풍이 바야흐로 전성기를 이루던 때였다.

경주 성내에서 무려 30리는 족히 떨어져 있는 이조리에서 가세를 관리하고 외부 환경에 대응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최부자댁 육훈 중 하나인 ‘과객을 후히 대접’하기 위해서도 이조리로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전과 관련해 최염 선생님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또 한 가지 말 못 할 사정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추후로 미루어 두기로 한다.

여하간 최언경 공과 최기영 공 부자는 이조에서 교촌으로 오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한 것이 분명하고 제7편에서 말했듯 그 이전 최종률 공(1724~1773)부터 땅을 사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장기간의 포석을 두고 교촌 이전 작업이 진행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생들의 반대였다. 당시 유생들은 최부자댁이 교촌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 만만치 않은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만한 것이 향교는 공부하는 곳인데 부잣집이 바로 옆으로 이전해 오면 아무래도 면학 분위기를 해칠 것이 분명하다.

부잣집이 들어오면 달랑 그 집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식솔이나 가복들도 늘어나 연이어 집이 많아지고 사람들도 늘 것이다. 더구나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과객이 많기로도 소문난 최부자댁 아닌가? 그 많은 과객이 드나드는 만큼 시끄럽고 사람이 많아지면 이런저런 오물도 많이 나올 것이다.

특히 당시의 선비들은 청빈을 덕목으로 삼던 시절인데 그와 반대되는 부자가 들어오니 상식적으로 반대의 명분이 많았을 법하다.

또 한 가지, 지금 추측해 보면 유림의 입장에서는 소문난 부자가 근처로 온다는 사실에 일종의 기대도 가졌을 법하다. 아무렴 몇 대에 걸친 큰 부자가 향교의 이웃이 되는 마당에 최소한의 기여는 하지 않을까 싶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 반대’의 목소리를 은근히 내는 것이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장에서 말하겠지만 실상 향교가 나라에서 규정해놓은 전답으로 운영되는 기관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올수록 재정 충당이 어려워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실정이었다.

이런 마당에 향교를 둘러싼 일부 유림 인사들이 최부자댁 이전이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떠들썩하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 이전을 가만히 앉아 먼 산 불구경하듯 앉아서 승인할 리가 없다.

최언경 공이나 최기영 공 역시 이런 유림의 반대를 익히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선심으로는 이전이 쉽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져 온 바는 없지만 아마도 양자 간에 심상치 않은 교섭과 화의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 결과 다음 장에서 펼쳐질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에는 향교라는 이름의 걸림돌을 상생이라는 디딤돌로 바꾸는 멋진 이야기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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