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금강산’으로 불러주세요

가장 먼저 ‘금강산’(金剛山)’, 이름이 붙여진 산으로 추정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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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에 제작된 지도집인 ‘해동지도’에 소개된 경주. 금강산은 ‘소금강산’이 아닌 ‘금강산’으로 표기돼 있다. <제공: 서울대학교 규장각>

드디어 북산 서쪽 고개에 장사 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佛道)를 행하면 이내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차돈 순교 이후의 이야기를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북산 서쪽 고개’에 대해 주석을 달고 “곧 금강산이다. 향전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 지냈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일연이 주석을 통해 언급한 ‘금강산’은 현재 경주시청 인근에 있는 해발 177m의 나지막한 산이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은 ‘소금강산’이다.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하는 지도와 국토정보맵 공식 표기도 ‘소금강산’이다.

반면, 문화재청은 지난 2022년 6월 이 산 인근 표암봉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으로 명명했다.

이에 발맞춰 최근 들어 학계에서는 소금강산을 금강산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주장이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 탈해왕릉 쪽에서 본 금강산 전경<제공: 문화재청>


‘소금강산’ 아닌 ‘금강산’이 본래 이름

기록에 따르면 이곳 금강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금강산’(金剛山)이란 이름이 붙여진 산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신라 6촌’(村)을 언급하면서 금강산이 등장한 게 첫 사례다.

일연은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 신라 6촌 가운데 하나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을 설명하면서 “(금산은) 지금의 금강산 백률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또 신라 6촌 중 하나인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을 언급하면서 “(고야촌) 촌장은 호진(虎珍)으로,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다”고 기록했다.

진덕왕(재위 647~654)조에, 신라에서 종교적으로 신성시하던 ‘4영지’(四靈地)를 언급할 때도 금강산이 등장한다. “신라에는 영험 있는 땅이 네 군데 있으니, 큰일을 의논할 때는 대신들이 여기 모여 의논을 하면 그 일이 꼭 성공하였다.

첫째로 동쪽에 있는 것을 청송산(靑松山)이라 하고, 둘째로 남쪽에 있는 산을 우지산(亏知山)이라 하며, 셋째로 서쪽에 있는 곳을 피전(皮田)이라 하고, 넷째로 북쪽에는 금강산(金岡山)이다”라는 내용이다.

금강산은 신라시대 ‘북악’(北岳), ‘북산’(北山) 등으로도 불렸다. 북악, 북산 등의 이름은 신라시대 왕경을 에워싸 제사(祭祀) 대상이 된 다섯 산인 ‘신라5악’(新羅五嶽)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5악의 주인공은 신라 중심부인 왕경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었다. 토함산(吐含山)을 동악, 금강산을 북악, 남산을 남악, 선도산仙桃山)을 서악으로 불렀다.

이때의 중악을 단석산(斷石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보이는 중악이 팔공산임에도 이를 단석산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한 오류이다. 
그래서 통일기 이전부터 ‘신유림’(神遊林)’으로 불리며 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던 낭산(狼山)으로 보는 견해가 대안으로 제기되어 있다.

삼국통일로 영토가 확대된 뒤에는 왕경의 5악과는 별도로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이 신라5악으로 설정되었다.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鷄龍山), 남악은 지리산(地理山), 북악은 태백산(太伯山), 중악은 부악(父嶽,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이들 5악은 국가제사인 중사(中祀)의 제일 첫머리에 배치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강원도 금강산은 당시만 하더라도 풍악(楓岳), 개골(皆骨), 상악(霜岳)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금강산으로 불리게 됐다. 
그렇다고 고려 후기 이후 경주 금강산이 강원도 금강산에 밀려 소금강산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지리지와 지도, 기행문 등에 경주 금강산이 등장하는데, ‘소금강산’으로 표기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아래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1660년 현종이 내린 시호 교지를 전달하는 사시관(賜諡官) 자격으로 경주를 방문한 뒤 남긴 ‘남정록’(南征錄)의 기록이다.


백률사는 부의 동북쪽 7리 금강산 위에 있는데, 산세가 지극히 높거나 크지는 않지만, 암석이 기이하고 오래되었으며,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다.

이처럼 경주 금강산은 조선 말까지 여전히 ‘금강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1914년 일제의 지명개정 이후 ‘소(小)금강산’으로 명명됐고, 1917년 일제가 작성한 지도에 소금강산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박방룡 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경주 금강산은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에 의해 소금강산이란 새로운 호칭으로 사용됐다”며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잠깐은 소금강산보다 금강산을 선호한 듯 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소금강산이란 이름으로 정착됐다”고 말했다.

아마도 강원도 금강산과 혼선을 피하기 위해 명칭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차츰 금강산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소금강산이란 이름이 정착됐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한 지도를 보면 ‘금강산’이란 산명은 다수 있다. 충남 서산 금강산(316m), 경기 안성 금강산(241.4m), 전남 해남 금강산(488.3m)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이유로 경주지역 안팎에선 ‘소금강산’으로 불리
는 경주 금강산도 ‘금강산’이란 본래 이름을 찾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소금강산이란 이름은 일본인들이 만든 일제의 산물”이라며 “지난해 문화재청이 ‘경주 금강산 표암봉 일원’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 것을 발판 삼아, 이젠 1500년 가까이 불렸던 금강산이란 이름을 되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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