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를 깎고 기둥도 낮추고… 집보다 향교가 우선 !!

세상과의 조화를 원한 최부자댁

박근영 기자 / 2023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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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영 공이 지은 사마소 내 병촉헌.

앞장에서 예고했듯 최언경 공 부자는 향교, 다시 말해 유림과 화합하기 위해 파격적인 계획을 제안한다. 그것은 만만히 보아 넘길 일이 결코 아니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향교에 대한 조선의 정책적 배려를 잠깐 살펴보면 향교는 제도적으로 국가에서 그 규모에 따라 교수를 배정하고 토지와 노비를 지급해 안정적으로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러 가지 자료에 따르면 향교가 융성한 성종대에는 성균관을 비롯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정해 지방 수령이 각 지역에서 거둬 해당 향교에 지급하도록 조치되었다.

경주는 ‘부’였으므로 10결의 세수만큼을 할애받은 셈이다. 조선시대 1결은 농민 한 명이 혼자서 지을 수 있는 평균적인 땅 넓이로 요즘 평수로 하면 약 3000평에 해당하는 넓은 땅이다. 10결이면 3만 평이나 되는 넓은 땅이니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후대로 내려올수록 적어진 것은 물론 도처에서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향교가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숭유했다고 할 수는 있을까? 절 수리 잦았던 조선이 억불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조선이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절대적 다수의 백성이 떠받드는 불교를 함부로 괄시할 수 없었다. 얼핏 봐도 태조 이성계부터 무학대사를 가까이했고 경복궁 내에 불교행사를 여는 함원전(咸元殿)을 지어둔 것,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가장 먼저 편찬한 서적이 석가모니의 집안과 관련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이었다는 것을 봐도 불교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의 유적을 봐도 가장 유명한 절인 불국사의 경우 세종, 성종, 중종, 명종대에 대웅전, 관음전, 자하문, 극락전 등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후에는 광해군, 인조, 효종 대를 거치며 보수한 기록이 있다. 석굴암도 숙종대와 영조대에 중수한 사실이 있다. 참고로 항간에 잘못 알려져 있듯 석굴암이 오랜 기간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 우체부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속설과 달리 겸재 정선의 화첩에도 나오고 조선말기 울산병사 조예상에 의해 중수된 기록도 있다. 분황사 역시 광해군 때 보광전을 중수하고 약사여래를 주조·봉안한 기록이 있고 숙종 대에 다시 보광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중창이나 수리, 봉안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불교 유적들이 조선시대 전반에 수시로 꾸준히 중창되거나 보수된 사실들을 두고 본다면 불교의 재정이 그다지 궁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활발한 중창이나 수리를 한 불교가 억압당했다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교가 국교로 여겨지던 통일신라나 고려에 비해 승려의 신분이 낮아지고 권위도 떨어진 것은 사실일 테지만 흔히 상상하듯 막무가내로 억압당하지는 않았을 성싶은 것이다.

반면 유학이 국시인데다 과거가 관료진출의 등용문이고 향교가 그 과거를 지지하는 국책교육기관인데도 불구하고 재정적 지원이 불안해 제대로 교육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것은 숭유(崇儒)의 나라에서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심지어 향교의 담장이 무너져 오랜 기간 보수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최언경, 최기영 부자는 이런 향교의 재정적 후원을 자청했다. 향교를 전격 수리하고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고 책과 문방구를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다. 향교를 다녀보면 경주 향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큰 규모다. 이런 향교의 규모를 감안하면 쉽게 지원할 대상이 아닐 텐데 향교를 지원하겠다고 했으니 유림이 내심 반가웠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사마소(司馬所)를 함께 지원한 것도 눈에 띈다. 사마소는 16세기 초인 성종말~연산군 시대의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 소과라 불렀다)에 붙은 선비들이 자기들 나름의 지방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사설 시설이다. 처음에는 학문과 정치를 토론하는 듯했지만 지역의 터줏대감 노릇으로 전락한 곳이 사마소다. 최씨 부자는 사마소를 전면 수리하는 것은 물론 이때 병촉헌(炳燭軒)을 새로 짓고 책과 문방구를 전격 지원했다. 이를테면 주요 명분상으로는 유학을 숭상·장려하고 토호세력화 된 지역 선비들과 두루 친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참고로 사마소는 기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기자의 부모님이 젊은 시절, 기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병촉헌에 몇 년 세들어 산 적 있었다. 그런데 당시 계약을 최염 선생님의 부친이신 최식 선생님과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미루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마소의 실질적 소유권을 최부자댁이 가지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사마소는 지금의 월정교 북측에 있던 것을 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월정교 복원을 대비해 1984년 300미터쯤 서쪽으로 옮겨 지금의 자리로 잡았다. 기자의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던 시기였다.



대문과 집은 낮고 안채는 부잣집 답지않게 초라해 보인다. 이게 경주최부자댁의 차별점이다.

이쯤에서 그쳤다면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두 부자분들은 경주의 유림들에게 단순히 보여주기가 아닌, 감동을 주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게 아니면 비록 벼슬을 살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유학도임을 자부하고 있었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아래 조치들이 교촌 시대를 연 최부자댁의 진면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최언경, 최기영 두 부자는 집을 옮기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결행한다.

첫째, 향교를 존중해 집터를 석 자 이상 깎는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발상이다. 어떻게 땅을 낮추어 집을 지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향교는 그냥 학교일 뿐이다. 요즘 같으면 학교 건물 옆에 집을 짓는다고 터를 일부러 낮춘 것이다. 그러나 두 부자분들은 향교를 단순히 건물로 보지 않고 그 속에 배향된 유학의 성현들을 우러러본 것이다. 향교에는 성균관과 똑같은 이름과 기능의 ‘대성전’이란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중국 유학의 성인들과 우리나라 유학 성현들을 모신 사당이다. 향교에 배향된 선현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집터에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향교와 맞닿은 최부자댁 터를 보면 향교보다 좀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깎아낸 흙을
 최부자댁 후원 뒤쪽에 가산(假山)으로 쌓았다는 이야기는 역시 7편에서 했다.

둘째, 집의 위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지금 최부자댁은 그 옛날 이조리에서 옮겨온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게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옥은 ‘가구식’이라고 해서 위에서부터 하나씩 드러내면 해체와 이전을 쉽게 할 수 있다. 지금도 경주에는 전국 각지에서 옮겨온 한옥들이 많고 안동에는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에서 많은 한옥을 옮겨 간 사례가 있다.

여하간 최기영 공은 이조에서 집을 옮겨올 때 모든 기둥들을 두 자씩 깎아 집의 높이를 스스로 낮추었다. 또 일부러 대문도 작게 만들었다. 최부자댁을 방문하는 분들은, 그래서 최부자댁을 좀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문가를 방문해 보면 지붕이 높고 대문도 솟을대문이라고 해서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대문을 달고 특히 문짝 위로 지붕을 올려 엄청난 위용을 부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남 일대 가장 소문난 부자인 경주최부자댁은 어딘지 모르게 집도 좀 포근하고 대문도 낮아 다른 명가에서 보는 위엄이나 위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안채는 영남일대 최고의 부잣집치고는 얼핏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터를 낮추고 기둥을 깎았다는 것은 단순히 터를 낮추고 집을 낮춘 것이 아니라 유학과 향교, 성현에 대한 마음으로의 겸양을 나타낸 것이다. 아마 이런 부자는 단연코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아간 부자들은 많지만 멀쩡한 자기 집 기둥을 깎아 낮추고 집터를 일부러 깎아낸 부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그게 경주최부자가 다른 부자들과 확연하게 차별화된 출발점일 것이다.

나는 종종 최부자댁을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만나면 반드시 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러면서 최부자댁은에서는 육훈이나 육연 등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최부자댁 집 자체다. 낮은 대문과 위압적이지 않은 지붕 높이, 일부러 낮춘 집터를 돌아보면 세상과의 조화를 꾀한 최부자댁의 현명함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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