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詩碑)와 함께하는 경주 가을산책

본지 1990년 연재 ‘시비순례’를 찾아
목월·청마·고무신·이경록 시인 시비

이상욱 기자 / 2023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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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경주에서 태어나거나 경주를 사랑했던 시인들의 노래 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 감성의 계절이다. 1990년 초 경주신문 시비순례(詩碑巡禮)을 통해 세상과 가까워졌던 시인들의 시비와 우리 삶을 더 성숙하게 물들일만한 단풍은 가을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목월의 시비를 비롯해 청마시비, 고무신 시인과 이경록 시인의 시비다. 본지에 소개된 지 3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의 흔적을 찾아봤다.

↑↑ 목월의 노래비 ‘송아지’ 1990년 초 모습.

목월의 노래비 ‘송아지’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두 귀가 얼룩 귀
귀가 닮았네.


송아지는 유년 시절 누구나가 다 부르던 노래말이다. 경주 황성공원 내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있는 獨山 서쪽아래에는 박목월의 송아지 노래비가 있다. 이 노래비는 1968년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경주의 뜻있는 어른들과 새싹회 후원으로 세워진 노래비다. 

↑↑ 목월의 노래비 ‘송아지’ 현재 모습.

박목월은 ‘나그네’로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진 경주의 시인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으로 1916년 1월 6일 경주군 모량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목월은 경주금융조합에 재직하던 1940년 조지훈의 추천으로 ‘文章’지 9월호에 가을 어스름, 연륜 등으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다.

문단에 등단하던 그해 결혼하고, 이듬해 휴직해 문학수업을 위해 2회에 걸쳐 일본으로 갔으나 문학은 홀로 공부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믿고 귀국했다.

해방이 되던 해 경주에서 대구로 이사해 4월 김동리,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두진 등과 조선청년문학가 협회를 결성했다. 이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했다.

1948년 서울로 이사, 서울대 음대 강사를 역임. 시문학(1950년), 심상(1973년)을 발행하고 1969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대 학장에 취임한 2년 후인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뒤 지병이던 고혈압으로 영면했다. 
시집으로는 청록집의 7권과 4권의 동시집, 20여권의 에세이집을 남겼다.

↑↑ 청마 유치환 시비 1990년 초 모습.

의지의 시인 청마 유치환

생명파 시인으로, 의지의 시인, 사상(思想)의 시인으로 불리는 청마 유치환의 시비가 불국사 남쪽 석굴암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에 있다.


목 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라


시비에는 유치환 시인의 시 ‘석굴암 대불’의 앞부분을 새겨놓았다. 유치환 시인의 시비는 그가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한 이듬해인 1968년 가을 건립됐다.

↑↑ 청마 유치환 시비 1990년 현재 모습.

유치환 시인은 경주와의 인연이 매우 깊다. 시인이자 교육자인 청마는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해 극작가인 형 유치진과 함께 잡지 ‘부여부’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고, 1931년 시 ‘정숙’이 문예월간에 발표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한 때 평양에서 사진업을 하기도 했고, 만주를 방랑하기도 했으나 해방 후 경주고·경주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우리에게는 더욱 친숙한 시인이다. 유치환 시인의 대표작은 국정교과서에 실린 ‘깃발’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박종우 시인의 시비 1990년 초 모습.

고무신 박종우 시인 ‘鐘’

선도산 동남쪽 기슭에는 古無新 박종우 시인의 시비가 있다.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설움을 터뜨리지 말라


↑↑ 박종우 시인의 시비 현재 모습.

그의 작품 ‘종(鐘)’의 일부가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울주군이 고향인 박종우 시인은 많은 학교를 다녔으나 보통학교와 고대 경영대학원을 제외하고는 한 군데도 졸업증서를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고무신 시인은 1950년 시집 조국의 노래를 발표하고, 1957년 작푼 ‘나’가 사상계에 신인상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그의 아호인 고무신(古無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이에 대해 정민호 시인은 “그의 아호는 자기가 지었는데, 고무신이란 말은 ‘옛 것 뿐이요 새것은 없다라는 뜻’이라고 한다”며 “또 어떤 이는 ‘옛것은 없고, 모두 새것이다’고 풀이하는 이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아호에 걸맞게 항상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했으니 그의 아호는 그대로 고무신과 연관 있는 것으로 되어버렸다”고 전했다.

고무신 시인은 그의 호처럼 거무티티하고, 질기고, 마구잡이고, 구수하고, 인정미가 넘치는 일면과 천재같이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박종우 시인은 1950년대 후반 경주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경주공고 교사로 재직했었다. 시비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77년 5월 25일 고향만큼 사랑했던 경주에 세워졌다.

↑↑ 시인 이경록 시비 1990년 초 모습.

천재 요절시인 이경록 ‘사랑歌’

그대 며칠 전 八百里(팔백리) 밖 阿火(아화) 안말에서 띄워보낸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오늘 아침 東南風(동남풍)과 함께 닿아 내 몸의 숨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오다. 흘러 들어와 그 말의 숨결이 내 心臟(심장)의 피 덥히며 온몸을 흐르다. 八百里 밖 사람아, 그대 사랑한다는 말의 하늘 길로 또 내 말을 보낸다.

오늘밤 錦江(금강)이나 秋風嶺(추풍령) 上空(상공)에서 내 말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소리치며 떠 헤매 가리라.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이 나라의 사랑하는 마음들아, 한 마디씩 씨받아 팔 괴고 잠들어라.


↑↑ 시인 이경록 시비 현재 모습.

29세 아까운 나이로 요절한 시인 이경록 시비에 새겨진 그의 대표작 ‘사랑歌’다.
이경록 시인은 1948년 1월 8일 경주군 강동면 다산리에서 출생해 경주중·고교를 거쳐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적 재질을 널리 떨친 이 시인은 1973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달팽이’와 이듬해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이분법’이 각각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등단 후 1977년 지병인 백혈병으로 요절할 때가지 4년여간 많은 시를 발표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시비는 그와 함께 활동했던 ‘자유시동인’의 발의로 경주중 24회, 경주고 15회 동기회가 추진해 1986년 1월 진현동 우정의 동산에 건립했다. 이후 2015년 황성공원으로 시비를 옮겼다.

이번에 찾은 이들 시인들의 시비와 주변 환경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경주에는 이들 시인 외에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다수 있다. 경주는 문화·관광도시이자 문학도시이기도 하다. 이 비들 간을 연계할 수 있는 문학지도나 문학기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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