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에 관한 오해와 진실

‘이차돈순교비’ 비지정문화재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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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률사 대웅전. <제공: 문화재청>

‘이차돈순교비’를 이야기할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기념비가 비지정문화재라는 사실이다.

2014년 문화재청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차돈순교비’를 보물로 지정 예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경주 금강산에 있는 백률사와 조계종 측이 순교비의 소유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보물 지정은 보류됐다. 소유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백률사를 포함한 불교계는 ‘이차돈순교비’가 국보급 문화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것이 처음 세워진 곳이 백률사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소유권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불교계는 ‘이차돈순교비’가 1910년대 초 백률사에서 재발견됐으며 1914년 국립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졌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록에 순교비는 백률사 불전 맞은 편 산중 덤불속이나 사찰 문전 가시나무 숲 등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도 주요 근거로 들었다. 1655년 선산 도리사에 건립된 ‘아도화상사적비’에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백률사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도 주요 근거였다.



‘경주백률사석당기’란 이름 등이 오해 불러

사실 ‘이차돈순교비’는 818년 조성된 이후 세월이 상당히 흐른 어느 시점에 실전(失傳)됐다. 그리곤 언제부터인가 ‘경주백률사석당기’로 알려져 왔다.

1832년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1794~1852)가 자신이 펴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서 ‘신라백률사부도육면당’(新羅栢栗寺浮屠六面幢)으로 소개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910년대 이 비석을 찾아내 1914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긴 일본인들도 대체로 ‘순교비를 백률사 근처의 숲속이나 덤불속에서 찾았다’고 증언했다. 앞서 언급한 ‘삼국유사’에서도 “(이차돈을) 북산 서쪽 고개에 장사 지냈다. 나인들은 이를 슬퍼하며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세 가지 대표적 사례는 백률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자추’(刺楸)를 ‘백률’(栢栗)로 동일시하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추’의 뜻이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이고, 그것인 곧 ‘밤’(栗)이니 ‘백률’과도 통한다는 것이다.

경주 북쪽의 소금강산 중턱에 자리한 백률사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 14년(527) 옥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젖이 솟았으며, 이윽고 그의 목이 금강산에 날아가 떨어져 그곳에 장사지내고 자추사라는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기록만 가지고 자추사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지금의 백률사를 자추사로 보거나, 혹은 금강산 정상으로부터 북쪽 약 20m에 있는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이 있는 곳을 자추사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차돈 순교비가 백률사에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자추사는 백률사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9년 펴낸 ‘우리 조상들이 다녀간 신라 왕경 경주’란 책에 담긴 내용이다.

백률사는 불교를 국법으로 허용해줄 것을 주장하다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자추사라는 이름의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언제부터 백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 발간한 ‘경주 석조문화재 모니터링 보고서 Ⅲ’에 등장하는 백률사에 대한 설명이다.

↑↑ 이차돈 순교비.


최근 “순교비와 백률사 관계없다” 주장 이어져

이처럼 학계에서는 앞서 설명한 내용을 근거로 자추사와 백률사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정설로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차돈순교비’와 백률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학계의 주장이 이어지는 분위기다. 순교비 내용도 그렇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 모든 사료를 샅샅이 훑어봐도 ‘이차돈순교비’가 백률사 소유가 될 만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까지 백률사를 찾은 이들의 여러 기행문에서도 ‘이차돈순교비’에 대한 언급은 단 1건도 없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수흥의 기행문이 주목된다. 그는 1660년 3월 왕명으로 경주로 내려와 5박 6일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기행문에 따르면 당시 그는 백률사를 방문해 절 주변을 둘러보고 기거하는 승려와 대화도 나눴으나 순교비에 대한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승려 또한 “절 가운데에 분황사에서 얻은 사리가 있는데 볼 만하다”고 하면서 비단 보자기로 10겹을 감싼 사리함을 그에게 가져가 보여줬으나, ‘이차돈순교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밖에도 1688년 정시한(丁時翰, 1625~1707), 1760년 김상정(金相定, 1722~1788), 1767년 임필대(1709~1773), 1773년 박이곤(朴履坤, 1730~1783), 1857년 송달수(宋達洙, 1808~1858) 등이 각각 백률사를 방문했으나, 이들이 남긴 기행문에서 이차돈 순교비나 순교비와 연관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가 백률사와 ‘이차돈순교비’와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백률사 주변을 뒤졌으나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백률사를 이차돈과 연관시킬 만한 기록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며 “과거 순교비를 백률사 경내에서 발견한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백률사석당기’로 부르게 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차돈순교비’가 1914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지기 이전, 비석이 발견된 정확한 위치를 명시하지 않은 게 오해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또, 자추사에 대해서는 “‘백률=자추’라는 언어학적 풀이에 근거해 만들어낸 또 다른 절 이름이거나, 이차돈을 기리는 사당을 지칭하는 이름일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금강산의 입지를 고려하고, 유력 후보지에서 노출되고 있는 유구 등을 토대로 새롭게 이차돈의 무덤과 사당터를 추정하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박방룡 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의 논문 ‘이차돈 사인 묘와 사당에 대한 단상’, 김태형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실장의 논문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찰’ 등이 대표적이다.

박 전 원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차돈순교비’를 발견한 장소를 두고도 다른 주장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1927년 발행된 ‘만선고고행각’이 “순교비가 백률사 경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굴불사터 사면석불보다 전방 100여m에 쓰러져 있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박 전 원장은 논문을 통해 굴불사터 사면석불 남쪽 100m 지점에서 이차돈의 묘와 사당터로 추정되는 유구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태형 실장은 이차돈의 무덤 등이 조성된 북산의 위치가 지금의 소금강산 쪽이 아니라 그보다 1㎞ 북쪽에 있는 168.5m 고지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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