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경주최부자였을까?

존재만으로 가치 있는 경주 최부자

박근영 기자 / 2023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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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학교 멀티미디어 지원센터 내 문파실에 붙은 할아버지 최준 선생의 동판을 우러러 보는 최염 선생.

내가 경주최부자를 주제로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 나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은 나를 말렸다. 그 이유는 경주최부자와 관련된 책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는 점과 경주최부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까지 나와 있는데 뒤늦게 그 책을 써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경주최부자를 처음 떠올린 후 바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반디엔루니스, 종로서점 같은 대형 서점들을 찾아보았다. 전체적으로 20종 가까운 책이 나와 있었다.

심지어 동화책도 있었다. 비록 도중에 흐지부지 막을 내렸지만 드라마 ‘명가’도 제작되어 한때 인기절정을 달렸던 김영철 씨가 경주최부자댁 정신적 지주가 된 최진립 장군 역을, 탤런트 차인표 씨가 실제 부자의 틀을 닦은 최국선 공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만하면 경주최부자를 다룰 만큼 다루었다고 누구나 생각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지금까지 나온 경주최부자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라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책들의 내용이 천편일률이었다. 모든 책이 최부자댁의 육훈과 육연, 최준 선생(1884~1970)의 독립운동에 대한 짧은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최진립 장군(1568~1636)으로부터 따지면 12대 400년에 가깝고 부자로 운신하기 시작했던 최국선 공(1631~1682)의 청년기부터 최준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1970년까지만 따져도 10대 32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기, 최대 부자였던 경주최부자댁이 이 정도로 허술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의 책들을 써주면서 느낀 나름의 절대적인 명제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드라마는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할 말이 없는 일반인들도 그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물을 쏙 빼놓을 기막힌 이야기들이 책 한 권 분량씩은 있다는 것이 내가 자서전 대필을 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하물며 조선 중기와 후기를 관통하며 영남일대 최고의 부자로 명성을 얻었던 명가라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겠느냐는 것이 내 기대였다.

게다가 궁금한 것도 많았다. 도대체 최부자댁이 얼마나 부자였고 그래서 무엇을 먹고 살았고 옷은 어떻게 입었고 집은 어떻게 꾸몄고 과객을 대접했다는데 어떤 과객들이 있었고, 만석꾼이었다면 실제로 땅은 얼마나 가지고 있었고 진사 벼슬 이상 살지 않았다면 양반의 체통은 어떻게 행사할 수 있었고 진사는 또 몇 명이나 나왔는지..., 더구나 부자 3대 가기 힘든다는데 어떻게 10대, 12대를 부자로 보냈는지. 그 부자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심지어 부자댁 가문에서 엄청난 건달 보스까지 나왔다는데 그것은 어떤 연유인지... 궁금한 것이 차고 넘쳤다. 내가 궁금한 것만 찾아서 써도 책 서너 권은 충분히 쓸 자신이 있었고 당당히 베스트셀러를 기록할 자신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4년 동안 3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을 무려 5권이나 썼다. 그 중 제 1권은 최부자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가 주된 내용으로 내가 가진 원초적인 의문들을 풀어나가는 데 할애했다. ‘The 큰 바보 경주 최부자’라는 제목의 이 책에는 모두 34편의 글이 들어있는데 이 34편 속에 든 이야기들은 장담하건데 이전에 나온 경주최부자 책을 전부 끌어보아도 정보의 면에서 내가 쓴 책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다른 책에서 책 한 권을 다 써서 다룬 육훈이나 육연이 내가 쓴 책에서는 한 편 한 편씩으로 집약된 대신 그만한 가치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34가지나 찾아서 썼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야기할 게 있다. 이 책의 제목을 정하는데만 거의 1년이 걸렸다. 제목 속에 있는 ‘큰 바보’라는 단어 때문이다. 책이 작가인 내가 아닌 최염 선생님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식으로 서술되다 보니 최염 선생님께서 “조상님들을 향해 후손인 내가 어떻게 감히 ‘바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느냐?”고 꺼리신 때문이었다. 충분히 염려하실 만한 일이라 여겨져 그 문제를 들고 여러 분과 상의하기도 하고 조동걸 교수님, 박병호 교수님 등 각계의 원로 석학들을 일부러 만나 조언을 구하시는 등 검증을 끝내는 끝에 제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제2권은 최준 선생님 일대기였다. 여기에는 최부자댁에서조차 미처 알지 못하는 최준 선생님에 대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비사와 삼성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최부자댁 재산의 이동에 관한 기막힌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나는 최준 선생님을 초인(超人)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에 대한 확고한 철학도 초인에 가깝고 나눔에 대한 마음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자선사업가들을 완전히 뛰어넘은 초월적 용단을 내리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의 일대기가 우리 현대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고 더구나 경주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기록이 소수에 의해 독점될 때의 일이다. 더구나 최준 선생님은 패배자도 아니고 역사 속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자임에 분명한데 이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애석한 정도를 넘어 통탄스럽다. 이런 선각자를 제대로 되새기고 배우지 않으면서 정치와 경제 쪽의 인물들에 집착하는 것은 대한민국 지성의 한계다.

제3권은 최염 선생님의 삶을 통해 본 조상님에 대한 회고, 할아버지이신 최준 선생님과 나눈 평생 동안의 일화와 교감을 그렸다. 대학 창립에 가문의 전재산을 기부하고 더 이상 부자가 아닌 상태에서 최염 선생님이 할아버지 최준 선생님을 모신 것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더구나 최염 선생님 당신의 일화를 통해 본 최준 선생님의 또 다른 신념들은 갑질을 일삼는 현재의 재벌들과 이른바 교육재단을 운영하며 교육자라 하는 사람들이 엎드려 받들어야 할 교훈들이다.

유감스럽게도 디자인까지 다 해둔 이 책들은 당시의 어떤 상황과 사정으로 인해 출판을 미룬 채 지금까지 노트북과 외장하드 메모리 속에서 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이 실체들이 세상으로 나와 그 밝은 빛을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머지 두 권은 ‘소설’이다. 최진립 장군으로부터 최준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12대를 관통하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사실에 내 나름의 취재와 역사 속 인물들을 동원해 소설을 썼다.

예를 들어 최진립 장군과 관련해서는 권율 장군과 사명대사, 당시의 경주부윤 박의장, 도산성에서 고전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명나라 장수 양호, 광해군과 인조, 최명길, 강홍립 같은 인물이 동원되고 최국선 공의 이야기에서는 실학의 태두인 유형원과 실학자들이, 최의기 공에 이르러서는 김창흡, 정선, 당대 문장가였던 김병연, 금강산 정양사 방장 설제스님 등이 나오는 식이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최준 선생님과 관련해서는 최익현, 의친왕, 신돌석, 박상진, 손병희, 김성수 등 근대사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인물과의 관계도를 만들고 그들의 개인사를 찾는 과정 덕분에 조선 중후기 역사와 구한말에서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도 모르게 많은 지식이 쌓이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었다.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들을 먼저 출간하고 싶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탄탄하게 고치겠다는 생각에서 퇴고를 거듭하다 보니 지금까지 밀렸다. 더 솔직하게는 요즘 작가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대단한 작가들이 많은지 그들의 책과 그 책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들을 보다 보니 적어도 그에 필적할 만큼의 재미와 구성을 갖추지 않고서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오기가 생겨 책 출간을 미루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체득한 요점이 있었다. 경주최부자는 정말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게 가치 있고 재미있는 가문이라는 점이다. 이 정도의 가문 이야기는 어지간한 왕조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한 저력을 가졌다. 특히 최부자 가문이 대대로 이어온 나눔과 상생의 정신은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높고 귀한 정신이고 가풍이었다. 세상에 어느 부자가 300년 넘게 지속할 수 있었고 설혹 부는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어느 부자가 이렇게 인심을 얻으면서 지속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 기본적으로 인심을 얻으면서 부를 이룬 부자들이 있기나 했다는 말인가?

이전 호까지 최부자댁을 둘러 싼 교촌 주변의 이야기를 했다면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최부자댁 정신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 예정이다. 이번 호에는 그에 앞서 이끄는 말씀을 드렸다. 다음호를 기대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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