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상서장(上書莊)에서 읽는 최치원의 詩

곳곳마다 고운 선생의 흔적, 최치원의 숭고한 문학정신 최우선되길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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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이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상서장.

최치원의 명성에 비해 경주에는 최치원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상서장과 독서당, 숭복사비, 서악서원 등 몇 곳이 있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908년?)이 태어난 곳은 경주 사량부이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황룡사지 남쪽과 미탄사지 북쪽 사이쯤 된다. 동궁과 월지, 반월성 그리고 상서장, 독서당과의 거리도 아주 가깝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로 조기 유학길을 오를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열 두살 아들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를 못하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며 열심히 공부하라 당부하며 써 준 글이 인백기천(人百己千)이다.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상서장에 온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없을까?


↑↑ 상서장 옆에 위치하고 있는 고운대.


상서장

경주 남산이 시내 쪽으로 가장 가까이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는 상서장은 고속도로 진입로와 접하고 있어 찾기도 쉽다.

최치원(崔致遠)이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으로 상서장(上書莊)이라 부른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지어 올렸다는 애국충절의 상징성이 강한 곳이다. 후대에 와서 고려 현종은 최치원의 학문과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곳에는 상서장, 추모문, 영정각과 조선 고종 때 세워진 ‘문창후 최선생 유허비’가 있다. 바로 옆 그리 높지 않은 곳에 고운대라는 바위가 있다. 여기 앉아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라벌 왕궁을 내려다보는 최치원을 생각해본다. 상서장으로 오르는 계단 우측에는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가 새겨진 시비가 있으며 뒷면에는 ‘한중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건립했다’는 취지가 새겨져 있다.



泛海 (범해)- 시 한 편의 우주

시 「범해(泛海)」는 최치원의 학문적 깊이와 문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掛席浮滄海 (괘석부창해)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 (장풍만리통)
긴 바람 만리에 통하고 있네
乘槎思漢使 (승사사한사)
뗏목타고 떠난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採藥憶秦童 (채약억진동)
약초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日月無何外 (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허공밖에 있겠지만
乾坤太極中 (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극의 안에 있네
蓬萊看咫尺 (봉래간지척)
봉래산이 가까이에 보이니
吾且訪仙翁 (오차방선옹)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범해(泛海)」 전문

『고운집 』 제1권에 나오는 오언율시인 이 시는 한글로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참 다양하다. 전체적 내용이야 비슷하지만 풀이하는 사람에 따라 읽는 느낌과 맛은 사뭇 다르다. 한문이나 한시를 자주 접하지 못하는 요즘 사람에게는 주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지랖인 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시 해설에 살을 보태어 봤다. 왜냐하면 인용된 문장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 그리고 사건을 알면 쉽고 재미있게 읽어지기 때문이다.

1행과 2행의 長風萬里通(장풍만리통)은 이백의 시 「돛 달고 강에서 달을 기다리니」에서 가져와 응용했다.

3행의 한나라 사신은 장건(張騫)이다. 한무제(漢武帝)가 황하의 근원을 찾으라고 명하니, 장건이 뗏목을 타고 떠났던 일을 떠올렸다. 장건은 동서문화 교류의 선구자이자 외교관, 여행가로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4행의 진나라 아이들은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기 위해 서복과 함께 떠난 천여 명의 아이들을 말하며 서복과 관련된 이야기는 제주도 서귀포와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다.

5행의 무하(無何)는 『장자』에 <응제왕>편에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인용하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고을이란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을 말한다.

6행은 왠지 우리나라 태극기가 떠오르고 주역으로 풀이가 요구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7행 봉래산은 중국 전설 속의 산으로 선인(仙人)들이 살고 불사의 영약이 있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이다.

8행은 최치원의 신선 사상과도 연결된다.

최치원이 어느 시기에 어떻게 썼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시는 귀국, 귀향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신라로 돌아온 직후 또는 은거 시기에 쓴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여하간 「범해(泛海)」는 최치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임을 증명시켜 주는 시이다.

↑↑ 상서장 입구에 자리한 최치원의 시비.


최치원의 시를 좋아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중국의 시진핑은 최치원을 좋아한다. 국제 행사에서 두 번이나 최치원을 불러내었다. 2013년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쾌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한다.”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의 첫 구절을 첫마디로 언급했다. 한중 우호 관계 지속과 더 친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치원의 시구절을 인용했다.

그리고 ‘2015 중국 방문의 해’ 서울개막식 행사에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최치원의 「호중별천(壺中別天)」을 또 인용했다. ‘동쪽 나라의 화개동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시구를 직접 소개하며 “한국의 시인 최치원이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칭송했다. 한국 사람은 중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중국 사람도 한국 문화의 독특한 매력을 좋아한다. 양국이 인문적 교류를 확대하는데 튼튼한 기초가 되고 있다”고 했다.

시 주석이 두 번에 걸쳐 고운 최치원의 시를 언급한 것은 한중 양국 간 역사에서 문화 교류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최치원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만 해도 대 중국 관계가 호의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제관계와 정세라는 것이 정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기도 한다. 한때는 일본 관광객이 많았다가 중국 관광객이 많았다가 하는 것을 관광 도시 경주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이다.



21세기의 최치원

상서장에서 올린 최치원의 상소문은 허약한 신라 말기의 왕실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의 「시무십조」는 훗날 고려시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고려의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되었다.

어쩌면 최치원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유형적인 유물이나 유적보다 그는 문장으로, 학문으로, 철학으로 세상에 나타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은 공자를 모신 사당에 최치원을 배향하려 영정을 만들고 서당을 건립했다. 유교 중심의 세상이 아닌 오늘날, 많은 변화를 거듭하지만, 지자체마다 최치원을 숭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 옛날 최치원의 발길이 닿았거나 머물렀던 곳곳마다 고운 선생의 흔적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관이나 문학관을 건립하고 문학제, 음악회, 포럼 등을 개최하며 다양한 행사들을 경쟁적으로 펼치고 있다. 긍정적이고 좋은 문화 현상인 반면에 이곳이나 저곳이나 특색 없음이 우려된다. 최치원의 숭고한 문학정신이 최우선 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글로벌 시대에 맞는 21세기형 수만 명의 최치원이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기를 바란다. 고운 선생의 시 한 편이 마른 논에 물들어가듯 가슴으로 스며든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없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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