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훈,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1]

가훈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최부자

박근영 기자 / 2023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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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00석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진 최부자댁 곡식창고

경주최부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부자 가훈이다. 흔히 육훈(六訓)과 육연(六然)을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많은 독자들이 육훈을 더 기억하실 것이다. 굳이 언급하면 1.사방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2.진사 이상 벼슬하지 마라 3.흉년에 땅 사지 마라 4.과객을 후히 대접하라 5.만석이상 재산을 불리지 마라 6. 며느리 3년 무명옷을 입혀라 등이다.


3268명 아너소사이어티, 동반성장위원회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경주최부자 정신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1612호에서 ‘사랑의 열매’와 관련해 이 기획란에 쓴 기사를 잠시 떠올려 보겠다. 사랑의 열매는 기사에서 썼다시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준정부 기관이다.

그런데 기자는 이 사랑의 열매 1층 로비에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나라 기부와 자선, 상생의 정신을 대표하는 곳이 경주최부자댁이란 사실을 증명한다고 믿은 것이다. 취재 당시 사랑의 열매 2층 1억 이상 기부자인 ‘아너소사어티 라운지’에는 3268명의 명단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기부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경주최부자가 중시한 정신의 일부가 스며 있을 것이다.

내가 쓴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책에는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회장의 일화가 있다. 이분이 2012년 경주 힐튼 호텔에서 열린 경주최부자 학술 심포지엄에 특강 차 참석했다가 행사 주최측에서 특강비를 지급하려 했더니 이 사례비를 한사코 거절하면서 최부자댁 종손인 최염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제가 이번 경주최부자 심포지엄에 특강하기 위해 육훈을 공부하면서 배운 게 훨씬 많은데 그런 제가 어찌 특강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정운찬 회장은 특강비를 끝내 사양했고 그 후 동반성장위원회 관련 행사를 할 때면 자주 경주최부자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기업 간 사회적 갈등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기 위해 합의를 도출하고 함께 성장하는 문화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으로 설립된 단체다. 그 수장이었던 정운찬 총리가 동반성장 위원회의 성장 해법을 경주최부자의 육훈에서 찾았다고 하는 것 역시 사랑의 열매가 중시한 경주최부자 정신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주최부자댁의 교훈에 대한 기업들과 방송 언론, 각 방면 학자들의 관심이 해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방송과 언론에서 다룬 경주최부자 관련 프로그램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학자들이 최부자댁을 주제로 낸 연구논문과 책도 늘어나고 있다. 내가 쓴, 경주최부자댁의 전범이라 할 만한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를 인용한 사례도 많아지는데 그 이전에는 이런 내용으로 다룬 책이 없었기에 좋은 모범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나친 허구로 인해 일찍 방송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경주최부자댁 시조격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과 실제 부자로 입신하기 시작한 최국선 공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명가’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공통점은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근간이 육훈(六訓)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육훈이 어느 시기에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최부자댁 종가에서 정식으로 전해져 오는 게 없다. 나는 이점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기로 하고 하나씩 육훈이 두른 베일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2대 최동량 공이 가거십훈(家居十訓)을 남기신 것과 3대 최국선 공이 명화적의 난을 겪은 후 나눔을 시작했다는 집안의 내력으로 미루어 육훈은 최국선 공 이후에 하나씩 더해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려 보았다. 나는 그 과정을 소설형식으로 하나씩 꿰맞추어 놓았는데 출간하게 되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것이다.

최부자댁 기록과 내려온 구전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부를 일으킨 최국선 공은 사옹원 참봉 벼슬을 버리고 낙향,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의 기본을 마련했다. 여기에 이앙법, 즉 모내기를 도입함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부를 이루었을 때 뜻하지 않게 명화적을 만나 곡식을 빼앗긴 이후에는 크게 깨들은 바가 있어서 이때 장리쌀 내준 장부를 태워 버리고 단갈림, 다시 말해서 소출에 대한 반분작을 시작한다. 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스스로 구휼미를 내어 백성들을 구제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최국선 공은 부자는 되었지만 천석 정도의 부를 이룬 것으로 집안에서는 추측했다. 이것은 최염 선생님의 말씀이니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늘 들어온 선생님의 말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만석꾼이 된 분은 4대 최의기 공으로 짐작된다. 최의기 공은 최국선 공의 둘째 아들로 이때는 재산 상속이 장자(큰아들) 중심이 아니고 여식까지 포함해 자식들이 균등 상속받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최국선 공의 재산은 자식들에게 분할된 결과 누구도 두각을 드러낸 부자가 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최의기 공이 다시 재산을 모아 만석꾼 소리를 되찾았으니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최염 선생님은 최의기 공 역시 2~3000석 정도의 재산을 이룬 것으로 짐작했다. 구체적인 수치 개념이 부족하던 시대, 천석꾼이나 만석꾼은 재산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의 의미가 있고 당연히 그 기준에는 과장이 섞였을 것이다. 그러니 2~300석 정도만 되어도 천석꾼으로 흔치 않은 부자, 2~3000석을 이루면 만석꾼으로 과대포장되었을 법하다.



육훈의 출발은 최의기 공! 과객 맞이·사회 환원·가용으로 삼분, 구체적인 재산 사용법 시작

그런가 하면 최의기 공은 재산을 사용하는 방법들을 구체화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즉 매년 수확하는 곡식 중 삼 분의 일은 빈민구제를 위해서 쓰고 삼 분의 일은 과객 맞이에 쓰고 나머지는 가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삼분법은 육훈과도 사뭇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육훈 중에 만석 이상 재산을 늘리지 말라는 말은 그 초과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말이다.

어쩌면 최의기 공은 벼슬하지 못한 대신 덕을 쌓는 한편 중앙이나 지방 관리들과의 교분을 쌓아 집안의 입지를 다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중앙 관원이나 지방의 관원들이 공무로 경주를 들리거나 지나칠 경우에는 경주 부에서 지은 정식 객사인 동경관(東京館)이 있어서 이곳에서 묵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관원도 아니고 공무로 여행 오는 것도 아닌 중앙의 관료 출신 양반들이나 세도께나 있는 인사들이 경주로 올 경우 마음 편히 묵을 수 있는 곳이 최부자댁 같은 부잣집 이외에 별달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과객 맞이는 비단 최의기 공이 아니라도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지역 유지들은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할 일종의 의무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편, 과객맞이를 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도 있다. 옛날에는 요즘 같은 숙박업이 전무할 때이므로 부자들뿐만 아니라 여염집에서도 과객맞이가 일상적이던 시절이었다. 길을 가다가 아무집이나 들러서 ‘이리 오너라’하고 들어가 재워주기를 청하면 그를 굳이 내쫓지 않았던 것이 우리 선조들의 미풍양속이었다. 그런 시대에 부자로 사는 사람들은 과객맞이를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정무공 이후 최동량 공은 현감 벼슬을 지냈고 최국선 공은 음직으로 찬봉을 지냈지만 최의기 공은 벼슬을 살지 않았고 과거에 급제도 하지 못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공부보다 재산을 늘리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나 최부자댁 과객 맞이에는 다른 부자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마지막 경주최부자인 최준 선생 대의 경주에는 이른바 4대 부자가 있었다. 정부자, 배부자, 이부자 그리고 최부자가 그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주사람들 말에 ‘3대부자를 모두 더해도 최부자와 안 바꾼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부자들에 비해 최부자댁이 받는 존경의 정도나 유명세가 다른 부자들보다 각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12대의 시간이 쌓은 전국의 인맥, 요즘 표현으로 네트워크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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