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보는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1

신라시대부터 근대까지
효자, 열녀 이야기 재발견
효자·열녀비 찾아 떠나는 경주 인물여행

이상욱 기자 / 2023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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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 기고자는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이다. 함 선생은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석굴암 최종결정 내릴 제1차 복원공사’, ‘천룡사 기와 가마는 사찰 전용’ 등 200여건에 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1973~1975년까지 천마총, 황남대총 등 황남동 일대의 신라 능묘가 발굴될 때는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문화유산뿐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신라문화동인회,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 에밀레극회, 경주시립국악원 등 경주의 문화단체 및 예술인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견습이발사로 이발소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무료로 고아들의 머리를 깎아줬던 이상민 씨의 이야기, 입어권 조정에 한 숨 쉬는 감포의 해녀, 병에 걸려 하얗게 말라가는 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월성의 농민 등 애정 없이는 포착할 수 없는 일상의 모습을 담았다.

그의 기자 생활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지방주재기자 철수가 단행되면서 막을 내렸다. 국림경주박물관은 지난 2017년 9월 함종혁 선생이 기록했던 경주를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시 ‘경주를 기록하다, 특파원 함종혁展’을 개최한 바 있다.

 당시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하려했던 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다시 소개하면서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 현곡면 소현리에 소재한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新羅孝子文孝公孫順遺墟碑))의 현재모습.


신라시대 손순, 애틋한 효심으로 얻은 석종,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新羅孝子文孝公孫順遺墟碑)


삼국유사에 따르면 손순(孫順)은 경주군 건천읍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부인과 더불어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쌀을 얻어 노모를 봉양했으며, 노모의 이름은 운오였다.

순에게 어린 아이가 있어 매양 노모의 밥상음식을 빼앗아 먹자 민망하게 여기어 오던 중, 어느 날 그 부인이 이르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다.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심하다. 
차라리 이 아이를 묻어버리고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아이를 업고 취산(남사리 북쪽골)에 가서 땅을 파다가 홀연히 땅속에서 기이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이 종을 걸고 두드려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퍽이나 아름답고 귀여웠다.

부인이 “이 석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 같으니 묻지 맙시다”고 하였다.

아버지도 아이를 업고 석종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이 석종을 대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반월성 대궐에도 들렸다. 흥덕왕이 그 종소리를 듣고 좌우에 이르기를 서쪽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청원함이 짝이 없으니 속히 조사하라 하였다. 신하가 손순집으로 가서 조사하고 사실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 1992년 지면에 실렸던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新羅孝子文孝公孫順遺墟碑)).

왕은 “옛날 한나라 곽거가 아들을 파묻을 때 하늘이 금솥을 내렸었다.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하매 땅이 석종을 냈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같은 귀감이라”고 말하고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었다.

순은 옛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고 ‘홍효사’라고 하여 석종을 안치했다. 진성왕대에 후백제의 도적이 그 마을에 침입,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는 현재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에 위치해 있다. 비각이 있는 자리가 손순의 집터라고 전해진다.


↑↑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남편 살리려고 자신의 살 베어 내 이식한 열녀 기려,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는 분황사 동쪽에 세워져 있는 비각이다.

6.25전쟁 때 북한군의 총에 맞은 남편 이진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붙여 살려낸 열녀 남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비문을 해석한 당시 보도에 따르면 영양남씨 분이씨는 18세 되던 해 8세 연상인 이진우 씨와 결혼, 경주군 양북면 용동3리 속칭 오암골에서 살았다. 자연부락 오암골은 오지마을로 30여가구가 골짝골짝 한집씩 살고 있는 산골마을이었다.

↑↑ 분황사 동쪽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를 모신 창렬각 전경.

8·15 해방직후라 무장공비들이 밤마다 마을에 내려와 쌀과 곡식, 닭 등을 약탈해가고 소고 끌고가며 심지어 청장년들도 끌어갔다. 이 같은 피해를 계속 당할 수만 없다고 해서 당시 이 마을 반장일을 맡아왔던 진우 씨가 앞장서서 마을청년들을 규합, 마을 경비를 서게 했던 것이다.

6.25동란이 발발하던 해인 1950년 음력 2월 3일 밤 진우 씨는 마을청년 10명과 함께 마을회관에 모여 경비를 하고 있던 중 밤 12시가 되어 무장공비 10여명이 갑자기 나타나 마을경비원 10명을 전선줄로 손목을 묶어 방안에 세워놓고 장총으로 마구 쏴 죽이고 죽은 시체 위에 짚단을 덮고 그 위에 기름을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이 경비실뿐아니고 마을 전체 민가에 불을 질렀다. 왼쪽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진우 씨(당시 42세)는 생명은 건졌으나 불에 타 화상이 심했다. 다음날이 밝아왔다.

마을 전체가 불타 잿더미로 변했다. 남씨 부인은 남편을 찾아 마을회관을 가서 살아 움직이는 남편을 발견했다. 남편을 업고 도로가에 나와 감포에서 생선을 싣고 대구 방면으로 가는 생선트럭 위에 남편을 태우고 경주까지 왔다. 남편의 다리는 흐늘흐늘 떨어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이때 한 원장은 “이대로는 생명을 구할 수 없다. 형제간이나 집안사람의 생살을 베어 이식하는 것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 1992년 지면에 실렸던 열녀비의 주인공인 남분이 씨와 이부인영양남씨창렬비(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이 때 남 여사는 내 생명 다해 남편의 생명만은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궁둥이와 허벅지 깊은 살을 예리한 칼로 마취하지도 않은 채 생채로 12편을 베어 병원에 주어 남편의 썩은 다리에 이식수술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심하게 부패된 부분은 살을 이식했어도 살아나지 않았지만 부패가 심하지 않은 부분은 살이 살아나기 시작하여 생명을 구하게 됐다. 목숨은 살았으나 다리가 시원치 못해 절뚝절뚝 절면서 1982년 74세 돌아가실 때까지 불구의 몸이 되어 부인이 구걸행상으로 남편을 공양했다.

이 같은 일이 문중에 알려지자 1973년 3월 이곳에 높이 140cm, 두께 20cm 화강석에 이영우 씨의 글로 비석을 세우고 창렬각(彰烈閣)이라 했다.

1992년 10월 16일자 신문에는 이 비의 사진과 함께 당시 77세로 생존해있던 남분이 씨의 사진도 함께 담아 보도했다.


↑↑ 오릉 인근 오천정씨 공적을 기록한 비가 있는 효열각.


목숨 바쳐 지키려했던 효심, 최진간 부부 이야기, 고독효월성처사최공열부오천정씨기적비


오릉 인근 흥륜사 건너 도로변에 최진간과 그의 열부 오천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각이 있다. 
고독효월성처사최공열부오천정씨기적비(故篤孝處士月城崔公烈婦烏川鄭氏記蹟碑)다.

경주시지에 따르면 지금부터 400여년전 이곳에는 월성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 성균관 진사를 지낸 최신린의 4형제 중 둘째아들 최진간 부부의 효심어린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당시 보도에 정리하면 선조 25년(1952년) 뜻하지 않았던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은 많은 병력과 신병기인 소총으로 침략해 경주읍성이 여지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최신린 진사는 최진립(정무공)·최계종·최봉천 등 집안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이 됐다.

그는 의병장인 김호의 진으로 달려가기에 앞서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가 어머님의 말씀에 쫓아 싸움터로 나가니 병환에 계시는 할머니를 너의 형제들에게 부탁해야겠구나”하고 적진으로 달려갔다. “아버님 염려마십시오. 할머니는 저희들이 목숨바쳐 모실 것이옵니다”

형제들은 늙은 할머니를 모시로 난리를 피하여 황룡산(지금의 덕동호 안쪽 황룡골) 깊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갔다. 하지만 산속에서 왜적의 무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적대장이 번쩍이는 칼로 할머니를 내려치려할 때 진간은 큰 소리로 “이들아 내게 덤벼라. 나를 죽여도 좋으니 우리 할머니는 손도 대지 말아다오”하면서 할머니를 덮어 가리었다.

왜적의 칼날이 다시 한 번 번쩍이는 순간 검붉은 피는 하늘 높이 치솟고 진간의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 1992년 지면에 실렸던 고독효월성처사최공열부오천정씨기적비.

이때 남편 진간을 따라 황룡산으로 피난갔던 정씨부인은 피비린내 나는 남편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할머니는 왜적의 손에 무참히 돌아가셨고, 남편 진간은 지극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아내된 도리로 어찌 죽기가 싫어 구차스럽게 살아 있겠는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진간의 갸륵한 효성의 얘기를 전해 듣고 그 효행을 드높이기 위해 독효자(篤孝子)로 표창했다. 정씨 부인에게는 백미 100석을 내리면서 정렬부인으로 높여 포상했다.1972년 세운 이곳 효열각(孝烈閣) 비석에는 이 같은 공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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