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훈 제2편, ‘진사 이상 벼슬하지 말라’ 그 깊은 뜻은?

가훈속에 담겨있는 세상의 이치와 흐름

박근영 기자 / 2023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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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복원된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별채에 걸린 현판 대우헌과 둔차.

최부자댁 육훈 중에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게 단속’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은 부가 생기면 대부분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곤 했다. 부를 이루는 것도 쉽지 않지만 권력을 가지는 것은 더 어렵고 일단 권력을 잡으면 부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세계사에서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피렌체의 대표적인 부자이자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만 해도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무려 4명의 교황을 배출하며 이탈리아
는 물론 유럽 전역에 맹위를 떨쳤다.

우리가 아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가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예술가들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고 지동설을 주장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후원하고 군주론을 써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던 마키아벨리가 목숨 걸고 잘 보이고자 노력했던 가문 역시 메디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그 어떤 나라의 왕족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명성을 가졌다.


4명의 교황을 만든 피렌체 메디치 가문, 진시황을 만든 거상 여불위, 과연 부와 권력이 함께 한 결과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춘추전국 시대를 통털어 가장 많은 부를 이룬 거상 여불위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잡기 위해 조나라에 와 있던 진나라 서자를 도와 왕위 계승자로 만들었고 마침내 그 가계에서 왕을 세우는 공을 세움으로써 왕을 제외한 진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왕에게 바쳐 훗날 자신의 아들인 영정이 진시황제가 되고 자신은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이런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고 넘친다. 그러니 부귀(富貴)라는 말이 자연히 생긴 것인데 여기서 귀는 다름 아닌 권력이다. 그런데 왜 최부자댁에서는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 심지어 진사는 벼슬도 아닌데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최염 선생님은 부(富)와 귀(貴)를 다 가지는 것은 과욕이라 여긴 조상님들의 관념이 이런 교훈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성리학적 가치가 존중되던 조선 중후기에는 청빈낙도 혹은 안빈낙도가 선비의 큰 자랑으로 여겨지던 때다. 그런 시대, 관리가 되려면 청빈해야 하고 부자가 되려면 아예 벼슬을 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겼음직하다는 말씀이었다.

최염 선생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나름대로 또 다른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최부자댁이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가르친 것은 2대 최동량 공에서 조금씩 형성되어 3대 최국선 공에서 자라 4대 최의기 공에서 매듭지어졌을 것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최동량 공이 벼슬에 염증을 느꼈을 법한 이유는 아버지인 정무공이나 작은 아버지 계종공이 무공이 많았음에도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한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동량 공 자신은 용궁(지금의 예천군)현감을 지낸 사람이다. 현감이면 종6품으로 지방 수령 중에서는 가장 말직이다. 당연히 녹봉도 적고 영향력도 작다.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밥 먹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동량 공이 낙향한 이유도 청백리인 부친의 명성을 지키려면 일찍 낙향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을 것이다. 최부자댁 내력에 따르면 잠업(蠶業)을 집안에 권장한 것으로 전해져오는데 이로써 미관말직을 전전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최국선 공은 할아버지 정무공 덕분에 음직(蔭職)으로 사옹원 참봉으로 서울살이한 분이다. 그러나 쥐꼬리만한 녹봉으로 살기 힘든다는 것을 깨닫고 전격 낙향해 부를 이룬 인물이다. 당연히 벼슬살이가 고생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사옹원이면 궁중의 음식을 관장하던 곳으로 음식만 관장한 것이 아니고 궁중의 식자재와 관련한 살림살이 도구를 다 관리해야 했다. 

만약 시쳇말로 납품비리를 저질렀다면 만만치 않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가문의 명예를 중시한 것이 틀림없고 이때 이미 실사구시적 학문이 한양에는 활발하게 논의되는 때였으니 그런 와중에 이앙법을 공부한 것이 틀림없다. 마침 광해군 이후 전란으로 황폐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면 소유권과 상속권을 인정해주는 제도도 안착되어 있었다. 경주로 돌아와 획기적인 농사법과 파격적인 분배법으로 부를 이룬 최국선 공은 어지간한 벼슬살이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9명 진사 내면서도 벼슬 살지 않은 최부자댁, 당쟁과 사화 피하며 과객맞이로 꾸준히 인심 쌓으며 정보 얻어!!

숙종 대를 살았던 최의기 공 당시에는 허무맹랑한 예송논쟁으로 중앙권력들에 수시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런 풍파에는 권력은 하루아침에 절단나고 권력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서는 부 역시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런 미증유에서 살아남으려면 권력투쟁과 멀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벼슬을 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최의기 공은 벼슬을 살지 않았다. 대신 앞 장에서 밝혔듯 스스로 이룬 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과객맞이다.

흉흉한 세파 속에서 부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중앙이나 지방의 권력들과 교류하고 많은 과객들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5대 최승렬 공 역시 벼슬을 살지 않는다. 그런데 최승렬 공은 ‘통덕랑’이라는 직급을 받았다. 통덕랑은 벼슬 명칭이 아닌 정5품의 직급을 일컫는 명칭이다. 최근으로 치면 사무관, 서기관, 이사관 식인데 그중 5급 사무관 정도 될 것이다. 이후로도 최부자댁에서 구체적으로 벼슬살이한 후손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은 엄연히 양반만의 법도가 있었다. 만약 3대가 넘도록 과거를 보지 않으면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다못해 3대에 한 명은 과거에 급제해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양반은 ‘잠반’이라고 해서 비아냥거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최부자댁도 벼슬은 살지 않을망정 부자로서의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과거를 보았다. 그래서 최승렬 공 이후 6대 최종률 공이 생원과에 합격한 이후 7대 최언경 공만 과거를 보지 않았을 뿐, 과거가 사라진 12대 최준 선생 이전까지, 전 세대 가주들이 모두 소과에 합격해 모두 9명의 후손이 생원 혹은 진사가 되었다.

생원이나 진사가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벼슬살이할 기본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었다. 특히 생원이나 진사가 되고서도 대과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학식과 소양을 갖추었으면서도 벼슬을 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은근히 우러러보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당쟁이 심해지고 외척과 관련한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부터는 벼슬하는 것을 멸시하는 풍습도 생겼다. 조선시대 후기로 오면서 최부자댁이 더 큰 명성을 얻은 이면에는 이렇게 벼슬을 초개같이 생각한 최부자댁만의 고집이 당쟁이나 사화 등으로 얼룩진 조선의 양반사회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경주 최부자가문이 앞에서 말한 메디치 가문보다 훨씬 훌륭한 사례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벼슬을 살지 않은 최부자댁은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으로 그 부를 위대하게 끝냈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으로 존재하는 동안, 최준 선생이 세운 대구대학이 영남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 순간까지 경주최부자는 살아 있는 셈이다.

그에 비해 메디치 가문은 끝내 7대 200년 만에 그 명성을 접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에 흡수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문의 명맥을 스스로 끊은 것이다. 부와 권력을 양손에 거머쥐고 진제국을 호령했던 여불위는 당대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부와 권력, 부귀를 함께 탐한 부자들의 끝이 어떻게 끝났는지 최부자댁 선현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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