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훈 제3편, 며느리들이 입은 무명옷의 두 가지 의미

무명옷이 담고있는 ‘공감’이라는 의미

박근영 기자 / 2023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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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들이 무명옷을 입고 다녔을 최부자댁 안채와 관광객들

육훈을 잘 살펴보면 경주최부자 가문이 세계의 많은 부자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다른 다섯 가지의 가르침도 물론 남다른 면이 있지만 이것은 어지간한 부자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굳이 벼슬을 살지 않아도 경제력이 곧 권력이 되고 자선이 부의 또 다른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느리 삼 년 무명옷을 입게 하라는 가르침은 확실히 눈에 띄는 덕목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겸양을 뜻하는 듯하지만 그보다 공감이란 측면에 더 무게를 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아랫 사람들과의 공감을 뜻한다.

‘시집온 며느리에게 무명옷을 입게 하라’는 가훈은 5대 최승렬 공 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최승렬 공의 부인은 당시 청렴하기로 유명한 토포사 집안에서 시집오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토포사는 포도청이나 지방관아에서 도둑이나 산적을 잡아들이는 무관의 직명이다. 청렴한 토포사 집안의 따님이었으니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따님이 부잣집에 시집왔으니 생활 수준이나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특히 자신은 귀천을 알아서 근신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윗사람들이나 아래로 들어오는 집안 며느리들은 대체로 명문가의 여식들이어서 귀천(貴賤)을 잘 모르는 공주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며느리들에게 만석지기 부잣집의 안살림을 맡기려면 무언가 특별한 가르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무명옷 입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무명옷을 입는다는 것은 아랫사람의 고달픔을 이해하는 것, 가복들에게도 귀한 무명옷을 입힌 최부자 인심


최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렸을 때 본 집안의 가복들도 무명옷을 입었다고 한다. 심지어 신발도 가복들이 신는 짚신을 신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부자댁 여성들은 집안의 중대사가 있으면 손수 가복들을 지휘해 집안일도 함께 했다고 증언하셨다. 다시 말해 며느리가 삼 년 동안 무명옷을 입는다는 것은 옷만 무명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삼 년 동안은 집안일을 함께 하면서 집안 형편도 알고 노동의 고달픔과 아랫사람들의 노고를 알게 함으로써 귀하고 천한 것을 제대로 깨닫게 한 것이다.

이런 경험은 최염 선생님께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염 선생님은 대학시절 경주 남천 건너편 사과밭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손수 밭을 갈고 나무를 심고 심지어는 똥물까지 퍼서 거름으로 주는 일을 한 해 내내 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셨다. 경주 최부자댁 귀한 종손이 똥지게를 져 날랐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렇듯 최부자댁은 후손들로 하여금 가복들이나 소작인들의 고충을 함께 겪게 함으로써 좀 더 야물고 겸손한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 가훈에서 ‘무명옷’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별도로 생각할 만하다. 무명은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서 지은 옷감이다. 여름에는 땀 흡수를 잘 하고 겨울에는 보온성이 가장 뛰어난 옷감이다. 부잣집에서는 비단옷을 즐겨 입었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속옷이나 일상복에서 무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또 조선에 상평통보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가장 중요한 화폐 대용품으로 쓰일 만큼 무명의 가치가 높았다. 다시 말해 가복들에게 일상적으로 무명옷을 입혔다는 것은 가복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았다는 뜻도 될 수 있다.

무명은 19세기 이후 외국에서 기계식 무명이 들어오고 특히 일제강점기 전후로 일본과 교역이 늘어나면서 일본산 무명인 ‘광목’이 들어오면서 무명의 가격과 질이 함께 떨어지는 무명 수난 시대를 겪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비단(명주) 다음 가는 최고의 옷감으로 귀한 대접을 받던 옷감임에 틀림없다. 최부자댁에서는 아랫사람들에게 무명 옷을 입힐 만큼 기본적으로 인심이 두터웠고 그 무명옷을 며느리들이 함께 입도록 함으로써 아랫 사람들과의 교감도 넓혔던 것이다.



흉년에 땅 사지 않고 만석 이상 재산을 늘이지 않은 최부자, 카네기 100년 적선 뛰어넘어

‘흉년에 땅 사지 말라’는 가훈 역시 경주최부자만의 철학이 돋보이는 가르침이다. 이 가훈은 명화적의 난을 몸소 경험한 최국선 공이나 재산분배법을 만든 최의기 공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것은 재산증식이란 면에서는 얼핏 우둔하게 보인다.

농경사회에서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많은 땅이 필요하다. 그러나 땅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만약 더 많은 땅을 가지려면 누군가의 희생을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 기회가 사실은 흉년 들 때였다. 이를테면 흉년이 들면 큰 부자들은 축적된 곡식이 있어서 타격이 덜 하지만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땅을 팔아서라도 곡식을 사야 한다. 당연히 땅값이 싸질 것이고 곡식은 귀할 것이다. 이때 부자들이 귀한 곡식으로 값 떨어진 땅을 사서 늘인다. 그야말로 빈익빈 부익부가 되는 것이다. 옛말에 ‘흰죽논’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죽 한 그릇에 한 마지기의 논을 판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흉년에 땅을 사는 것은 땅과 함께 원망과 원성을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최부자댁은 대대로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제하고 과객맞이에 소홀함이 없도록 배려하며 인심을 쌓아왔다. 그러니 남들이 굶어 죽는 어려운 시기를 악용해 값싸게 땅 사는 일을 진정으로 부도덕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요즘은 적대적 M&A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 재벌들의 재산 형성과정을 보면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탈세하거나 정치권과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거나 카르텔을 통해 가격을 담합하거나 나쁜 재료를 써서 눈을 속이거나 하는 방법들이 횡행한다. 땅을 주식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주식은 값이 떨어질 때 사고 값이 올라갈 때 팔아야 수익성이 커진다. 그런데 가격이 떨어지는 시기는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있거나 기업이 어려울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농사로 치면 흉년인 것이다. 경주최부자는 이럴 때 주식을 사지 말라고 가르친 셈이니 그 철학이 가히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부자들은 너도 나도 흉년에 땅을 사서 더욱 큰 부자가 되곤 했다. 농경사회에서 이것보다 쉬운 재산증식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모으는 땅은 반드시 원망과 한숨이 서려 있게 마련이다. 땅을 판 입장에서는 당장 연명하기 위한 몇 자루 쌀이나 곡식과 가족의 생명이 걸린 땅을 바꾸어야 했을 것이니 그 애환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렇게 땅을 파는 것은 빼앗긴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고 땅을 사간 부자에게 고스란히 그 원망이 맺힐 것이다.

이런 가훈은 자연스럽게 ‘만석 이상 재산을 늘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연결된다. 이 가르침은 만석이라는 상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만석은 농경사회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재산이지만 굳이 따지면 조선에서 손꼽을 만한 부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경주만 하더라도 만석지기 부자가 몇이나 되었고 경산에는 경주최부자보다 몇 배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만석을 뛰어넘어 몇 만 석지기 부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쟁쟁한 부잣집 중에서 경주최부자댁 만큼 존경받은 부자는 아무도 없었다.

흉년에 땅을 사거나 과객맞이를 덜 하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경주최부자 역시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경주최부자는 만석의 땅을 유지하면서 조선 제일의 부자가 아닌 조선 제일의 가치를 실현한 부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최부자댁의 가훈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나눔과 상생, 소통과 공유다. 그렇기 때문에 부를 쌓으면서도 원망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만인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부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자선재단인 카네기 가문이 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쌓았던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엄청난 자산을 쏟아부으면서도 그 나쁜 이미지를 씻는데 무려 100년이 걸렸다고 알려져 있다. 카네기 가문이 미리부터 경주최부자식의 나눔과 상생을 알았다면 100년의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도 명문 부자가문으로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가훈들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최대의 가훈 ‘사방 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전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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