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옥적玉笛, 경주의 상징

신라 삼기팔괴 중 하나, 경주의 자존과 존엄 상징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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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옥적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가장 경주다운 것은 무엇일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를 비롯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필자는 옥적(玉笛)을 맨 앞에 두고 싶다. 경주 사람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옥적은 경주 사람이라면 많이 사랑하고 기억해야 할 유물이다.

예로부터 옥적은 금척(金尺)과 화주(火珠)와 더불어 신라 삼기팔괴 (三奇八怪)로 불려왔다. 옥적은 경주를 떠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옥적이야말로 경주의 자존과 존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옥적이야말로 가장 경주다운 유물이 라는 생각이 든다.



옥적과 옥저

옥적은 국어사전에 ‘청옥이나 황옥으로 만든 대금 비슷한 취악기(吹樂器)’로 나온다. 근데 어떤 이는 옥적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옥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옥저의 저는 원래 ‘저[笛]’는 ‘적[笛]’으로 읽어야 하나, 때에 따라 ‘저’로 읽기도 한다. 옥적일까? 옥저일까? 쓰임새에 따라 달리 사용하는 줄 알고 처음에는 다소 혼동스럽기도 했지만 다 같은 옥피리라는 말이다.



경주옥적의 기원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옥적은 황옥으로 만든 것으로 길이 53.5㎝, 구경 3.3㎝이며 대금과 같은 구조를 가졌으나 길이가 조금 짧은 편이다. 신라시대부터 전한 것으로 추정하나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고 기록도 없다. 모양은 속이 빈 대나무로 만드는 전통악기인 대금과 비슷하다. 대금에 비해서 소리가 맑고 고음을 낸다고 한다.

옥적이 만파식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맞질 않는다.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주는 만파식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대나무로 만들게 된 이야기가 분명하게 나온다.

국립국악원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옥적은 국악의 역사에서 매우 미스터리한 악기로 분류된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 사용됐는지 기록이 거의 없다. 제례 등에 사용된 신성한 악기로 추정할 뿐이다. 경주옥적 외에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두 점이 더 있는데 모두 개인 소장품이다. 마찬가지로 신라시대 것이라는 확실한 단서는 없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옥적은 국립국악원 소장 옥적, 국립 고궁박물관 옥적, 미국 피바디엑세스박물관 소장 옥적이 있으며, 이외에도 옥산서원 소장 회재 이언적의 옥적, 병와 이형상의 옥적, 맹사성의 옥적, 장말손의 옥적 등 전국에 10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옥저는 옥의 재질이나 규격이 조금씩 차이는 있을 뿐 거의 비슷하다.

특이할 만한 점은 옥적을 보관한 목함에는 황동으로 만든 자물쇠가 부착되어 있는데 경주를 대표하는 월성과 안압지, 첨성대 그림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첨성대 구멍으로 성덕대왕신종 모양의 걸쇠가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옥적을 대하는 조상들의 예사롭지 않은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옥적 함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옥적의 기구한 운명

태조 왕건이 신라의 보물인 옥적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문경새재를 넘자 옥적은 아무리 불어도 소리가 나질 않았다. 이에 왕건은 옥적이 신물(神物)로 알고 경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경주의 풍물, 인문지리지인 『동경잡기』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다수의 경주 사람들이 왕건을 따라 개경으로 갔지만, 옥적만은 따라가지 않았다며, 굴하지 않은 충절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경주읍성이 왜군에게 빼앗겼다가 치열한 전투를 거듭한 끝에 1592년 9월 7일 보름만에 되찾았다. 죽장으로 쫓겨 가 있던 부윤 윤인함이 귀환해보니 동헌과 집경전, 객사를 비롯한 관아의 부속 건물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제대로 남아있는 유물이라곤 없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옥적만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부윤 윤인함은 이때의 슬픈 심정으로 시를 남겼다. 그의 저서 『죽재유고』 1권에 수록되어 있다.


임란 때 불타버린 동도엔 텅 빈 봉황대뿐인데 참담한 슬픈 바람이 내 얼굴에 스쳐간다. 옛 우물은 간데없고 옥적만이 있어서 달빛아래 불어 본 한 곡조 더더욱 애절하구나
-죽재 윤인함(1531~1597)

『동경잡기』에 백옥적(白玉笛)에 대한 기록이 별도로 나온다. ‘불에 타고 부서져 10여 조각이 났다. 임신년(1692년)에 김승학이 땅을 파다가 주웠다. 이를 사사로이 숨겨 두었다가 그만 가운데를 부러뜨렸다. 부윤 이인징이 밀랍으로 붙이고 은으로 도장 했는데, 세 마디에 구멍은 아홉개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잃어버린 옥적을 되찾은 이야기가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 경주 부의 객사인 동경관(東京館) 담장 아래에서 옥적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이야기인지 다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짜로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묻어 놓았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아무튼 기구한 운명의 옥적임에는 분명하다.


옥적을 탐낸 사람들

#연산군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은 연산군 때문에 생겨난 재미있는 말이다. 여색을 탐하고 노래를 즐긴 연산군은 피리 소리를 좋아했다. 흥을 돋구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주옥적을 바치게 한 내용이 「연산군일기」 54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504년 (연산군 10년) 7월 28일 연산군이 “경주(慶州)의 옥적(玉笛)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올려보내게 하라” 어명을 내렸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자 재차 다시 명을 내렸다.

 “옥적(玉笛)을 어찌 경주(慶州)에 두는가 내고(內庫)로 옮겨 간직하는 것이 어떤가?”하자 승정원 승지들이 아뢰기를, “신라의 옛것이므로 옛 도읍에 두는 것입니다. 내고로 옮긴들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였다. 지혜로운 신하들 덕분에 옥적은 서울로 가지 않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시 한 번 경주 옥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조실록」 80권에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왕에게 이르기를 “경주(慶州)의 옥적(玉篴)도 또한 기이합니다. 조령(鳥嶺)을 넘으면 피리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이야기를 논하다 경주옥적을 예를 들어 말한 것이다.


#일본 통감부 소네 아라스케
1909년 4월 경주 현장 시찰에 나선 일제 통감부(統監府)의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 일행이 경주 관아 건물을 나흘간 샅샅이 뒤졌다. 관기(官妓) 뗄감창고에서 새까맣게 변색된 목재함 하나를 발견했는데 4중으로 싼 함안에 옥적이 들어 있었다. 이듬해 1910년 경성으로 반출되어 이왕가(李王家)박물관(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13년이 지난 1923년 옥적이 다시 경주로 되돌아오게 된 데는 경주 사람들의 힘이 컸다.

1921년 9월 금관총 발견되어 금관을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기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여론에 밀려 포기하게 되었는데 경주 유지들과 양식 있는 일본인 19명이 합세하여 총독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금관과 옥적을 경주로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분 도굴로 각종 문화재를 빼돌린 모로가 히데오 라는 자의 도움도 컸다. 그가 도운 이유는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지 쇄신과 명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일본인이 경주옥적을 찾고자 한 닭은 무엇 때문일까? 헤이안 시대(794~1185)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에 고려적(高麗笛) 이야기 여러 차례 나온다. 한반도 옛 피리에 대해 고귀함이 불러일으킨 일본인의 환상이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2017년 한국학 연구원 아라키 준은 고고학지에 발표한 논문 「일제 시기 경주지역 문화재 반출경로에 대한 역사 인류학적 고찰」에서 금관총 금관과 경주옥적을 문화재 반출을 막은 것이 가장 우수한 사례였음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연산군이, 일본인들이 마저 탐을 내었지만, 옥적은 지금 경주에 있다. 이처럼 경주의 것은 경주에 있어야 제격이고 제맛이다. 경주옥적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청와대 불상도 고향 경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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