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훈 제3편, 사방백리라는 한계의 의미는?

사방백리 속에 숨어있는 최부자의 사회적 책무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04일
공유 / URL복사
↑↑ 보비림이 뚜렷이 보이는 경주최부자댁 전경.

‘사방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육훈의 가르침 모두가 제각각 아름다운 빛을 발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독보적이고 큰 스케일의 가르침은 바로 이 가훈일 것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돌본다’는 속담이 있듯 빈민구제는 나라조차도 어지간해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큰 숙제였다. 그런데 일개 부자가 사방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집안 대대로 유지했다고 하니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백리는 요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40km다. 최부자댁이 있는 경주 교촌을 기준으로 40km를 컴퍼스로 돌리면 동쪽으로는 영천, 서쪽으로는 청도와 경산, 남쪽으로는 울산, 북쪽으로는 포항과 영덕을 아우를 만한 넓은 지역이다. 지금이야 사통팔달 고속도로가 열려 있으니 40km면 지척이라 할 수 있지만 길다운 길이 별로 없었던 조선시대나 60년대 이전이라면 백리길이라면 하루종일 걸어서 가야 하는 먼 거리다. 그 정도 먼 길에 이르도록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은 얼마나 큰 사회적 책무를 일컫는 것인가!



죽은 사람에게조차 걷는 악랄한 세금, 삼정의 문란이 굶어죽는 사람과 유민, 화적을 만들다

여기서 ‘굶어 죽는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 말기, 정치가 혼미하고 탐관오리가 날뛰던 시대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은 백성들을 쥐어짜는 최악의 시련이었다.

삼정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다. 전정은 농사 짓는 땅에 매기는 세금인데, 이게 원래는 지주에게 부과하는 세금인데 부패한 지방 관리들이 지주들과 결탁해 이 세금을 소작농들에게 거두면서 불거진 폐단이다. 

조선 말기 지주와 소작농의 배분은 보통 7:3으로 지주가 유리한데 그런 야박한 배분에서 소작농이 세금까지 떠안다보니 일년 내내 농사지어봤자 먹고살 방도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세금마저 정식으로 부과되지 않고 허위로 백지정세(白地徵稅)라고 해서 장부를 조작하거나 황무지나 엉망인 땅을 옥토로 속여 과하게 세금을 매기는 방법, 도결(都結)이라고 해서 원래 거둬야 할 세금을 2배 이상 과하게 걷는 방법 등으로 소작농들을 수탈했다. 

이러니 농사지을 엄두가 나겠는가? 소작농들은 남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가 더 크게 날 지경이고 자영농이라 하더라도 어지간히 관과 연줄이 닿을 만큼 힘이 없으면 자기 농사지어서 관에 몽땅 가져다 바치는 신세를 면치 못하던 시대였다. 반면 관리들은 토지대장에 나온 땅을 누락시키고 그 세금을 관리들이 빼먹는 은결(隱結)이란 비리가 있었다. 그 비리로 관리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렸고 관과 줄이 닿는 부자들은 적절히 뇌물을 주고 은결을 통해 세금을 아끼면서 더욱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환곡은 지방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관에 부속된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마냥 쌓아둘 수 없으니 묵은 곡식을 방출해서 민간에 풀고 새 곡식을 다시 곳간에 채운다는 뜻에서 환곡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환곡은 보통 겨울이 지나면서 쌀이나 곡식이 떨어질 만한 시기에 토지를 가진 농민들, 다시 말해 갚을 능력이 보장된 농민들에게만 곡식을 내어주고 그해 농사가 완료되면 새 곡식으로 환수하는 제도였다. 얼핏 보면 곤궁한 백성을 돕는 구휼미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방재정을 안정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환곡이 임진왜란 등 난을 겪으며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중앙정부가 지방의 환곡을 중앙으로 편입시키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관리가 소홀해지고 부정한 관리들이 들끓으면서 내주는 곡식에 쭉정이나 모래를 섞어 내주는 분석(分石), 거둬들일 때는 엄청난 이자를 붙여서 거둬들이는 장리(長利), 강제로 환곡을 얻어가게 하는 늑대(勒貸), 장부를 조작해 환곡을 거두는 반작(反作) 등 양민들을 괴롭히는 악랄한 착취법이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관리들은 자기들끼리 짜고 환곡은 빼돌린 채 장부상으로만 곡식을 기입하는 허류(虛留)의 방법으로 인수인계하며 배를 불렸다.

군정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참혹한 광경들이 펼쳐졌다. 원래 군정은 만16~60세 사이 장정들을 대상으로 군역을 면하는 대신 베(군포(軍布))를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 역시 비리가 만연하여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세를 물릴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에게 물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 60세 넘은 노인에게도 억지로 거두는 강년채(降年債),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물리는 절구(絶狗) 등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도 모자라 세금을 못내고 도망간 집안사람에게 대신 물리는 족징(族徵),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이웃을 대신해서 물리게 하는 인징(隣徵) 등으로 군포를 물리니 백성들의 살길은 더더욱 막막해졌다.

이러니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구조다. 더구나 춘궁기가 되면 온산이 하얗게 덮힐 정도로 사람들이 산을 오르내렸다고 했다. 산이 하얗게 덮인다는 것은 나물이나 풀뿌리 같은 먹거리를 캐기 위해 사람들이 산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 대부분 물들이지 않은 채인 무명옷이나 삼베옷이니 산이 하얗게 보인 것이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던 것이 조선말과 구한말 농민들의 현주소였다.

그 시기에 이르면 대규모 화적이 자주 발생해 조정이 적잖게 골머리를 앓았고 유민들이 자주 발생해 사회적인 폐단이 되곤 했다. 이렇게 대규모 화적이나 유민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처럼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는 갖은 시련들이 끊임없이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이 도망가면 그 친척이나 이웃이 책임져야 하니 한 사람이 도망간다 싶으면 그 근처 사람들이 몽땅 몰려서 도망가거나 한데 어울려 화적질에 나선 것이다.


백리는 소문 듣고 찾아올 수 있는 한계 거리, 백리 밖은 서로 모르는 또 다른 세상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나라는 나라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하고 관리들은 그런 사명에 충실해 백성들을 일일이 보살펴야 하고 부자는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제해야 한다. 그게 법이고 도리다. 그러나 나라는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조차 모르고 관리들은 가난을 이용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부자들은 반대로 그 기회에 땅을 늘이고 부를 늘이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이었다. 이런 열악한 시대사적 난국 속에서 ‘사방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최부자댁 가훈은 그 자체로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다.

이에 대해 최염 선생님 회고도 기억할 만하다. ‘최부자댁 선현들께서 왜 하필 사방백리로 규정하셨을까’라는 우매한 질문에 최염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아마도 그게 그 당시의 소문이 날 수 있는 한계 범위였고 소문들 듣고 찾아올 수 있는 한계 거리였을 것이네. 아무리 곡식을 나눠주고 밥을 준다고 해도 너무 먼 곳이라면 찾아올 수 없을 것 아니겠나!”

아주 단순한 대답이셨지만 그만큼 분명한 해답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허기진 배를 안고 갈 수 있는 거리가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게 백리길 아니겠나. 최염 선생님 말씀이 또 이어졌다.

“우리가 어릴 때, 백리쯤 되면 아주 먼 경계라는 뜻이었어. 백리 밖이면 완전히 다른 고장이라는 의미가 있었어요. 백리 안은 사정이 비슷해서 어느 마을에 흉년이 들었다 하면 그 안쪽이 대부분 흉년이라 다 힘겹고 어려웠지. 그런데 백리 밖 다른 고장에서는 풍년이 들 수 있었어. 그러니 백리는 그 남모르는 경계의 의미도 있다고 보는 것이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이런 말씀을 최부자댁 종손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다행으로 여겼다. 최부자댁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런 가훈을 만들었는지를 분명히 따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