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처용 설화 깃든 서라벌 향한 첫 관문

외각에서 저지하는 전초 기지 역할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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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문성 동쪽 끝에 있는 신대리성 모습.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옛 성벽을 간직하고 있다.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遊)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이라는 관직까지 주었다.

처용 설화로 널리 알려진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조 기록이다. 헌강왕이 처용을 만난 곳은 ‘개운포’였다. 개운포는 울산신항에서 외항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곳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산 남구 황성동이다.

울산은 고대 신라 수도 서라벌의 관문이었다. 처용과 헌강왕이 함께 걸었고 각종 이역(異域) 문물이 지나갔을 이 길을 따른다. 처용을 만났다고 전해지는 개운포에서 반구동 유적지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 경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에 관문성이 나온다. 관문성 또한 반구동이 옛 신라의 무역항이었음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 관문성 동쪽 끝에 있는 신대리성 모습.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옛 성벽을 간직하고 있다.


서라벌 향한 첫 관문

관문성은 경주에서 외동을 거쳐 울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성이다. 울산 북구와 울주군, 경주 외동읍 모화리의 경계에 있다. 수도 경주의 동남쪽 입구에 해당한다. 통일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8호로 지정됐다.

당시 관문성 일대는 모벌군, 또는 모화군(毛火郡)으로 불렸고, 이 시기 성의 이름은 ‘모벌군성’, ‘모벌관문’이었다. 관문성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명칭이다. 관문성은 이 성이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만리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매우 긴 성이란 뜻이다.

↑↑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국도변에 복원된 관문성 성벽.

이와 관련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등장한다. 삼국사기는 “성덕왕 21년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日本)의 침입로를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엔 “효성왕 개원(開元, 당 현종 연호) 10년(722) 임술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으로 경주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792보 5자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9262명이며, 장원(掌員, 감독관)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경주와 울산을 잇는 이 길은 낮은 평지로 이어진 구조곡(지각 활동으로 만들어진 직선 형태 골자기)을 따라 나있어 육로교통 상당히 수월하다. 게다가 직선거리가 30㎞ 정도로, 하루면 이동이 가능한 거리다.

이런 이유에서 관문성 일대는 울산으로 침입한 왜구가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울산만으로 침입한 왜구들은 동대산만 넘거나 우회하면 경주평야를 쉽게 석권하고 경주까지 넘보게 된다. 따라서 관문성은 이 왜구를 경주 외각에서 저지하는 전초 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울산항이 당시 국제무역항 기능을 했었던 만큼, 배를 통해 울산으로 들어온 각종 물자가 수도 경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관문성을 거쳐야 했다. 경주와 울산을 잇는 길과 관문성이 만나는 어딘가에선 경주로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에 대한 검열과 단속도 행해졌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전덕재 단국대 교수는 “관문성이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만큼, 왕도로 들어가는 교통로 상에 관문을 설치하고 그 이름을 ‘모벌관문’으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 1920년을 전후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관문성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 성벽 흔적 곳곳에 남아

관문성은 크게 ‘장성’과 ‘신대리성’으로 나뉜다. ‘장성’은 경주시 외동읍 서편부터 남쪽을 따라 외동읍 모화리 동쪽 산 아래까지 길게 뻗어있는 약 12㎞의 석성이고 ‘신대리성’은 장성 동쪽 끝자락 삼태봉 남쪽 해발 584m 봉우리를 에워싼 둘레 1.8㎞의 타원형 석성이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산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군데군데 관문성의 옛 흔적이 남아 있다.

7번 국도를 지나다 보면 비교적 온전한 형태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 124-3, 경주방향 도로 인근에 있다. 도로가에 실물 크기 복제 다보탑이 세워져 있어 비교적 찾기가 쉽다. 경주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 어딘가에, 왕경으로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에 대한 검열이 이뤄지던 관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 외에도 외동읍 녹동리 인근 14번 국도변에서도 비교적 뚜렷한 형태의 성벽을 볼 수 있다.

관문성 동쪽 끝에 있는 신대리성도 옛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성은 행정구역상 남쪽과 동쪽의 일부가 울산에, 나머지는 경주에 걸쳐 있기 때문에 울산 사람들은 깃발고개(기령, 旗嶺)에 있다고 해서 깃발산성의 이두식 한자 표기인 ‘기박산성’(旗朴山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대리성이란 이름은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이 산성은 관문성의 동쪽 끝과 이어져 있지 않아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다. 관문성과 성벽이 이어져 있지 않아 별개의 성이라는 주장도 있고, 관문성과 매우 가까운데다 만든 의도가 관문성처럼 왜구의 감시·방어 목적으로 추정되는 만큼 관문성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지금은 관문성과 하나로 묶어 사적 제48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신대리성을 가기 위해선 7번 국도를 타고 울산에 접어든 뒤 매곡동 산업단지 쪽 산복도로를 타면 된다. 동해안 쪽에서 찾아간다면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에서 신대리 방향 산복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두 길은 동대산과 삼태봉 사이 고개에서 만난다. 이 고개가 깃발고개로 불리는 ‘기령’이다.

고갯마루에 ‘기령’(旗嶺)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곳에서 삼태봉 방향 300여m 지점에 신대리성 동문 터가 있다.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성 안쪽 곳곳엔 건물 터로 추정되는 평탄지가 여럿 보인다. 흙속에 박힌 그릇과 기와 조각도 눈에 띈다. 이곳에선 축성 당시 공사 내용을 기록한 성돌 10여개가 발견됐고, 성내 시설물로는 문지와 수구, 성내 건물지, 망루시설, 우물 등이 확인됐다고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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