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靑富), 장부(長富) , 현부(賢富), 그리고 미부(美富)와 종부(終富) [1]

오랫동안 깨끗하고 아릅답게 현명하게 이룬 부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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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본채 모습.

↑↑ 박근영 작가
두두리출판기획 대표
경주최부자댁 책을 쓰면서 나 나름대로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최부자댁 부를 근원적으로 정의해보자는 것이었다.

경주최부자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탁월함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반면 이런 가치에 대해 집중한 논문도 없고 책은 더더욱 없었다. 단순히 육훈이 어떠니 육연이 어떠니 12대가 어떠니 식의 매우 단편적인 정의들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기왕이면 경주최부자가 다른 부자들과 어떻게 다르고 어떤 면에서 가치 있는지를 자료를 모으고 책을 쓰는 걸음에 분명히 밝혀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크게 다섯가지 측면에서 경주최부자의 가치를 정리했다. 나중에 책을 쓰면서 최염 선생님께 이런 사항을 말씀드렸더니 매우 흡족해 하셨다. 선생님께서도 지금까지 당신의 조상님들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이렇게 다각도로 정의 내린 적이 없었다며 책에 올리는 것에 만족감을 표하셨다.



최부자댁이 여느 부자와 다른 것은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으로 마감한 그 마지막이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가장 첫 번째 정의는 청부(淸富)였다. 즉 깨끗이 이룬 부라는 뜻이다.

둘째, 장부(長富), 오랫동안 부를 유지했다는 말이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 이래 12대 400여년, 최국선 공으로부터 10대 350년 가깝게 부를 이어왔다고 해서다.

셋째는 현부(賢富), 어질고 현명한 부라는 의미다. 최부자 댁의 부는 나눔과 상생의 철학으로 인해 현명하게 전승되었기에 이렇게 정의한 것이다. 이러한 부는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빛과 향이 나는 부다.

그래서 네 번째로 미부(美富)라는 정의를 함께 썼다. 다섯번째로 경주최부자는 최후까지 부를 소멸시키지 않은 채 그 부를 새로운 사회사업으로 승화시킨 채 마감했다. 그래서 종부(終富)라는 정의를 내렸다. 특히 이 종부라는 개념은 최근 들어서 조금씩 부각되고 있다. 대부분의 부자는 후손들의 관리 부실과 과욕 혹은 사치와 오만한 탕진으로 비참하게 끝난다. 그에 비해 경주최부자는 최준 선생이라는 탁월한 지사의 등장으로 인해 부의 끝을 조국독립과 대학설립으로 마침으로써 여느 부자와 달리 오히려 그 끝이 더욱 찬란했다.

최부자댁 조상님들의 이런 사고방식, 특히 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자세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랄 수 있다. 요컨대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적 관념은 양반사회에서 관료들에게는 청렴결백을, 일반적 반가에는 안빈낙도를 최고의 덕목인양 강조했다. 부자를 우습게 여기는 사회 풍조에서 벼슬길을 포기하고 돈 벌기를 택한 최부자댁 후손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이단아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중한 양반사회에서 어느 가문에도 뒤처지지 않을 가풍을 세울 수 있었고 존경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를 이루는 방법이 정당했고 그 부를 나누는 방법이 현명했기 때문이다. 청렴을 떠들며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들과 말로는 안빈낙도를 주창하며 갖은 권세를 누리던 양반들과 달리 최부자댁 조상님들은 관료로서 청렴결백하였고 비록 부를 유지했으나 원칙적인 반가가 주장하는 청정한 기풍을 몸소 실천하였기에 12대를 지나도록 흔들림 없이 집안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최부자댁 조상님들은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사람들은 흔히 최부자댁을 향해 12대 400년 가깝게 부자로 살아왔다고 여긴다. 대체적으로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 1568~1636) 장군으로부터 부자로 여겨서 이런 계산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무공은 어떤 분이셨을까?

정무공은 원래는 문반이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결연히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아 무인으로 변신, 25세의 젊은 몸으로 아우인 계종 공과 가속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초기에 의병으로 활동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관병으로 편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전국의 변방을 돌며 북으로는 여진족을 막고 남쪽으로는 왜군을 막아 경흥도호부 부사, 경기·충청·황해 3도 수군통어사, 공주 영장 등을 지냈다. 전공을 인정 받아 공조 참판을 제수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문반들의 자리이고 당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자칫 뜻밖의 논란이 일 것을 염려하려 사양하고 낙향했다.

정무공은 병자호란 당시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험천(지금의 성남)전투에 참전하여 장렬히 순국했고 전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평소 청렴결백하기로 이름 높아 효종 2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숙종 37년, 고향인 경주 이조리에 세워진 용산서원이 숭렬사(崇烈祠)로 사액됐다. 정무공의 숭렬사 사액은 다른 서원 사액과는 확연히 다른 면이 있다. 보통 서원은 문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지는데 정무공은 문인이 아니라 무인이다. 무인이 서원에 배향된 것도 드문 경우지만 사액된 경우는 유일해 정무공이 매우 특별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정무공이 경주최부자 종주로 받들어지는 이유는 정무공의 시대를 초월한 정신을 최부자 후손들이 계승·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방금 위에서 정무공께서 청백리로 녹선되셨다는 말을 했는데 조선시대 지방관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임기 중에 스스로 청백리라고 자찬해 비를 세우거나 후임 관리와 서로 짜고 청백리의 비를 세운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정무공은 스스로 청백리라 떠든 바도 없었고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이나 되어서 나라로부터 청백리로 인정받았으니 이 또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청백리로 칭송받은 무신이었던 만큼 정무공은 부자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정론이다. 윗대로부터 궁색하지 않을 만큼의 살림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평생 변방 임지로 떠돌아다니시면서 부자가 될 만큼 재산을 모을 틈조차 없었다. 더구나 말년에는 정3품직인 공주영장에 임명됐지만 한창 전쟁 중이라 녹봉을 받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부자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최부자를 논할 때 정무공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경주최부자 후손들이 정무공의 정신을 대대로 이어받고 체계화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정무공은 충과 의라는 시대적 사명을 다한 것도 그렇고 아랫사람과의 유대를 각별히 여겨 충노(忠奴) ‘옥동과 기별’의 신분을 뛰어넘은 신화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경주최부자의 정신을 근원적으로 세운 분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대인 최동량 공(1598~1664)은 정무공의 5남 2녀 중 3번째 아드님이다. 최동량 공은 정무공의 무공(武功)에 힘입어 음서로 관직에 출사한 후 마지막으로 용궁(지금의 예천)현감을 지냈다. 현감이면 종6품 벼슬로 지금으로 치면 읍장이나 면장 정도의 벼슬이다.

치안과 재정, 조세까지 다 관리하던 당시의 현감과 행정만 관리하는 지금의 읍·면장의 권위를 대비하면 많은 차이가 나겠지만 그 시대에도 크게 높은 직책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부친의 청빈하고 강직한 벼슬살이를 곁에서 똑바로 지켜본 관리라 권력을 이용하여 축재(蓄財)할 만큼의 욕심을 애초부터 부리지 않았던 분이다. 그나마 최동량 공은 중년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양잠과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조금씩 재산을 늘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분 역시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다. 그것은 4남 2년 중 맏아들인 최국선 공(1631~1682)에게 물려준 재산 목록에서 알 수 있다. 최국선 공이 재산을 넘겨받은 것은 1651년, 만으로 스무 살이 되던 해다. 마침 이 해는 효종이 정무공께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리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한 해이기도 했다.

최국선 공이 음직으로나마 벼슬을 살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조정의 조치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하간 당시의 기록을 보면 노비 6명, 논 42두락, 밭34 두락이 전부다. 두락(斗落)이라는 말은 대체로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논이나 밭의 면적을 일컫는다.

‘마지기’라는 말이 같이 쓰이는데 요즘 단위로 논은 평지와 산지 혹은 논의 비옥도에 따라 한 두락이 100~300평, 밭은 100~400평쯤 된다. 그 시대의 특성을 고려, 이 정도면 부자 소리는 듣지 못해도 부농(富農)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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