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된 효자·열녀비 보존관리방안 마련 시급

양세정려각·최치백 정려비 등 2곳 관리 안돼
비문에 새겨진 거룩한 효(孝) 사상 상실 우려

이상욱 기자 / 2024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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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2]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편집자주

지역 내 오랜 역사를 지닌 효자·열녀비가 훼손된 상태로 방치돼 관리당국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달에 찾은 효자·열녀비 3곳 중 불국동 소재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과 내남면 상신2리에 위치한 ‘효자 최치백 정려비’ 등 2곳은 심각한 훼손이 진행되고 있지만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은 외부 담장과 출입문이 기울어져 있고, 비각 지붕의 기와와 비석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살대가 파손됐다. 또 내부에는 메마른 잡초들이 뒤엉킨 채로 방치돼있었다.

효자 최치백 정려비 역시 비각 지붕 기와가 떨어져 나가거나 나무 살대가 파손됐고, 주변에는 농사용 폐비닐 등이 방치돼 있어 정비가 시급해보였다.

이들 비는 조선시대 효자, 열녀, 열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지만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비석에 담긴 효(孝)의 의미마저 상실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등록 문화재가 아니어서 해당 비석 주인공의 문중 등이 관리주체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사유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

이에 따라 경주시가 더 이상 훼손이 진행되지 않도록 보존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본지가 지난 1992년 10월 31일부터 11월 16일까지 3주간(제141호~143호) 보도한 효자·열녀비를 찾았다.

불국동 소재 양세정효각과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 내남면 상신2리에 소재한 효자 최치백 정려비 등 3곳이다.

↑↑ 경주신문 제141호에 실렸던 양세정효각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은 불국사역(지금은 폐역) 맞은편 삼각로타리 인근 작은 못 노영지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비각 동쪽에는 구정동 방형분이 있다. 양세정효각은 효부 김석호 처 분성김씨 정효비(孝婦 金奭浩 妻 盆城金氏 旌孝碑)와 그의 시할아버지 증통훈대부사판사 월성 김기선 정효비(贈通訓大夫司判事 月城 金基選 旌孝碑) 등 2개의 비가 있다. 이 2개의 비에 대한 설명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기선 정효비: 김석호의 조부 김기선은 남달리 영특하고 행실이 착해 항상 부모님을 정성과 사랑으로 모시고 받들었다.
“효의 행함을 보려거든 김기선을 보라”며 사람들은 김기선을 효의 귀감으로 삼아 자기 자녀들을 계도했다.

김기선이 13살 되던 때 그의 부모님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부모님께서는 아주 귀한 생선과 꿩을 원하셨지만 찬바람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이었다. 아들의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이 겨울 어디 가서 생선과 꿩을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구해야만 한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바를 풀어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야”

김기선은 며칠을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엎드려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하길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구름이 몰려들었다. 겨울에 때 아닌 소나기가 내리더니 하늘에서 그렇게도 원하던 고기가 내리고 꿩이 돌연 뜰 앞에 나타났다.

“아! 하늘아 못난 자식의 마음을 알아주셨구나”하고 하늘에 감사하며, 고기와 꿩을 얻어 정성껏 부모님을 공양했다. 얼마 후 이로 인해 부모님의 병환은 쾌차했다.

 김기선의 효심이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나라에서는 그의 효성이 옛날 왕상의 효와 다름없다하여 극구 칭송했고,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28년 정흥각을 세웠다.

분성김씨 정효비: 김기선의 손부 분성김씨는 어릴 적부터 현숙한 기품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김씨는 출가 후 시부모님을 극진이 모셨다. 그러던 중 시어머님이 병환으로 눕게 됐다. 김씨는 자신의 도리가 부족해 어머님이 병환이 드셨다고 깊이 후회하며 죄책감과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어머님의 병환에 차도가 없자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청결케하여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빌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병환만 낫게 해주십시오. 이 몸의 덕이 모자라 하늘은 어머님을 버리시려 합니까? 차라리 저를 대신 거두소서”

이렇게 지성을 드리던 부인도 몸은 쇠약해지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했다. 김씨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시어머님의 병환은 심해만 갔다. 어느 날 시어머님은 졸도를 했다. 부인은 고통을 참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에게 수혈했다. 자신의 피로 인해 어머님이 회생하기 시작하자 부인은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하늘에 감사했다. 이렇게 효과를 본 부인은 하루에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어머님께 수혈하며 5일 동안 다섯 손가락 모두를 잘랐다. 결국 부인의 정성으로 어머님이 되살아났다. 며느리의 절지로 생명을 되찾은 어머님은 며느리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했다.

“네가 웬일이냐,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지. 이 불상한 것아!”

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김씨 가문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려각을 세우고, 비 2기를 나란히 안치했다.


↑↑ 경주신문 제142호에 실렸던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孝婦孫氏·孝婦崔氏 兩世旌閭閣)

7번국도 울산에서 경주방향으로 시래교를 지나 50여m 못 미쳐 도로 오른쪽 30여m 지점에 단청도 벗겨진 허름한 비각 하나가 있다. 이곳이 시 효부손씨와 효부최씨 양세정려비다.

월성손씨는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자라 덕을 제일로 손꼽았다.

차성이씨 집안에 출가해 알뜰한 며느리, 자애로운 어머니로 화목한 가정을 꾸려갔다. 어려운 살림에 늙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운데 남편이 유행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의원이 와서 남편의 맥을 짚어보고는 “어허, 가물치를 먹이면 낫겠는데···”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손씨는 마을 앞 못에 가서 여러 차례 하늘을 우러러보며 통곡하니,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엄동설한 두꺼운 얼음이 봄 얼음 녹듯 갑자기 녹으면서 가물치 한 마리가 얼음 위로 뛰쳐나왔다. 이를 잡아 남편에게 공양했다. 남편은 약효를 보아 완쾌했다고 한다. 얼마 후 남편의 병이 재발돼 운명 직전에 이르렀을 때 자부되는 월성최씨가 자신의 손가락을 돌에 찍어 시아버지 입에 넣었더니 5일간 연명했다. 그러나 시아버지 이씨는 오래 살지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 불국동 소재 ‘효부손씨·효부최씨 양세정려각’ 내부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손씨 부인과 며느리 최씨 고부간의 극진한 간호에도 보람없이 남편이 운명하자 슬픔과 놀라움을 못 이겨 손씨는 기진맥진했다가 끝내 남편을 따라 비명에 쓰러지고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에 며느리 최씨는 3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화장을 하지 않은 채 예로서 슬픔을 다하니 순조 2년(1802) 지방을 순시하던 암행어사에 의해 조정에 알려졌다.

나라에서는 두 고부의 효행을 크게 칭찬하고 무릇 온 백성의 귀감으로 삼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정려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 제143호에 실렸던 효자 최치백 정려비


효자 최치백 정려비(孝子 崔致栢 旌閭碑)

내남면 상산2리 마을회관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여m 올라가면 우측 논 위에 목조기와로 된 비각이 보인다. 효자 증조봉대부 사헌부 지평 최공치백 정려비(孝子 贈朝奉大夫 司憲府 持平崔公致栢 旌閭碑)다.

비문에 따르면 1629년 인조 임금님께서 신하로부터 최치백의 효행을 전해 듣고 사헌부지호(司憲府持乎)에게 명하여 길목에 효자비를 세울 것을 명했다. 최치백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남의 집에서 머슴과 품팔이를 하며 생활해 오던 중 늙은 부모가 괴질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됐다. 7년여에 걸쳐 부모를 봉양했으며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없는 정성과 효행을 다했다.

그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엄동설한에 눈 속에 대순이 솟아오르고 잉어가 얼음 위를 헤엄쳐 나와 이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기도 했다. 마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효자를 보려면 최치백을 봐라 할 정도로 칭송이 자자하자 향리의 선비들이 최씨의 효도 중 백행을 모아 상소를 올리자 인조는 그 업적을 영원히 빛내기 위해 비각을 건립해 모든 백성들도 이 같은 효행을 따르도록 명했다고 한다. 처음 최치백 비각은 상신리 음지마을에 세워졌다고 한다.

↑↑ 내남면에 위치한 효자 최치백 정려비는 지붕 기와가 탈락되는 등 파손상태가 심각하다.

인조 22년 오랜 세월동안 호우로 도로가 붕괴되고 전답이 파여 나가면서 비각도 무너졌다. 1923년 이를 안타까이 여긴 주변 5개 자연부락의 8명이 뜻을 모아 현재 양지마을로 이전하게 됐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풍우로 비각이 또다시 붕괴위기에 이르자 1981년 당시 월성군이 충효사상의 귀감으로 삼고자 중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문 글씨는 이조 때의 명필가인 이광사(李匡師) 선생의 친필로 서예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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