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靑富)의 시작 최국선 공의 실사구시적 이앙법과 반분작

차별성으로 일으킨 본격적 부자시대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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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영 작가
두두리출판기획 대표
부자로 살게 된 것은 바로 이 최국선 공 때부터다. 국선 공은 음서로 관직에 나가 사옹원 참봉을 지내게 된다. 사옹원은 궁중의 음식을 돌보는 기관으로 여기서 각종 육상 음식재료 뿐 아니라 어물과 도자기 등 그릇까지 관장하였다. 당연히 궁궐 내의 연회를 주관하고 이와 관련된 공납도 관장했다.

사옹원과 밀접한 도시로 경기도 광주가 있는데 이곳에 왕실전용 도자기를 생산한 분원자기가 있었다. 이곳에는 국내 최고의 도자기 장인들이 최고의 실력을 바탕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특히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은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으므로 그런 도자기는 국내 어느 곳에서도 만들 수 없었다. 분원자기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에는 굽에 파란 색 줄이 둘러져 있어서 누가 봐도 분원자기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구별되었다. 만약 분원자기가 아닌 곳에서 이 파란 색 줄을 쓴다면 이것은 왕실을 능멸하는 것으로 치부되어 중죄를 받았을 정도다.

참봉(參奉)은 종9품이다. 조선시대 관료사회가 정1품부터 종9품까지 모두 18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품계만으로 치면 문자 그대로 미관말직이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만만한 벼슬은 아니다.

사옹원은 전체적인 왕실 구조에서 보면 한직이라 할 수 있지만 음식 계통에서만큼은 최고의 관청으로 요즘 같으면 대통령실 주방과 식약청, 농림해양수산부, 문화관광부 내 요업 관련 부서를 모아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옹원에서 문고리 노릇을 하는 사람이 사옹원 참봉이다. 비록 미관말직이고 한직이라고 할 수 있어도 음식, 연회, 이와 관련한 각종 물품에 대해서는 최고의 관청이었고 사옹원 참봉은 그 문고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국선 공은 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버린다. 이유는 그 당시 그 녹봉으로는 도무지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봉이라는 벼슬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직급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황 선생은 종9품, 이이 선생은 정6품, 정약용 선생은 정7품을 받았다. 9품 참봉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품계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관직 명 제도를 대과에 급제한 대표적 인물들과 비교해 볼 만하다. 대과에 급제하여 처음 보직을 받을 때, 성적이 아주 우수할 경우 정6품이나 종6품 정도를 제수 받는다. 이건 매우 파격적인 대우다. 마침 조정에 공석이 나거나 운이 아주 좋은 경우, 정말 특출하게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이런 벼슬을 제수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표적으로 성리학의 태두로 알려진 퇴계 이황 선생은 대과에 급제한 후 종9품인 승문원 부장자를 제수받아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몇 해 만에 사퇴한다. 다시 대과를 보아 홍문관 수찬을 제수 받는데 이것은 이전의 경력까지 한꺼번에 인정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수찬은 정5품이다. 율곡 이이 선생은 생원시와 식년과 등에서 무려 9번 장원으로 급제한, 조선을 통틀어 가장 천재적인 분인데 첫 벼슬이 정6품 호조좌랑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은 첫 벼슬에 희릉(禧陵: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릉)을 관리하는 희릉직장을 제수 받았는데 직장은 정7품 혹은 종7품직이다.

이런 예를 굳이 든 것은 참봉 역시 양반 관료체제하의 어엿한 관원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참봉벼슬이 주는 녹봉으로는 제대로 밥조차 먹지 못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참봉의 녹봉은 한 해 동안 쌀 9석, 보리 1석, 콩2석, 면포 2필이 전부였다. 1석(淅)은 요즘의 80킬로그램 가마니로 하면 약 1.8가마니로 잡는다. 그러니 쌀 9석이면 대체로 16가마 남짓의 쌀을 말한다. 대가족 제도에서 더군다나 지금과 달리 애들을 굴비 엮듯 주렁주렁 낳을 시대에 밥만 먹고 산다면 모를까 이 녹봉으로 옷도 사 입어야 하고 반찬과 술도 사 먹으려면 상당히 힘들었던 셈이다.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공부한 끝에 제수받은 벼슬에 대한 대가가 이렇게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참봉의 윗 계급이 종 8품 ‘봉사(奉事)’다. 봉사라면 우리가 가장 밀접하게 본 것이 ‘심청전’일 것이다.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를 일컬어 심봉사라고 하고 봉사를 시각장애인을 얕잡아 보는 비속어쯤으로 하는데 사실 봉사는 꽤 권위 있는 벼슬 이름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봉사쯤만 되어도 쌀이 15석, 보리2석, 콩4석, 면포 4필로 근근이 생활할 만큼의 녹봉이 주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최국선 공은 이미 아버지 최동량 공의 경우에서 보듯 음직으로 출신한 사람이 승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먹고 살 만한 직위에 오르기 전에 굶어죽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법도 하다. 종6품 용궁현감을 지낸 최동량 공의 녹봉은 종6품 기준으로 쌀이 24석, 보리가 4석, 콩이 8석, 면포가 10필이었다. 식구 수에 따라 생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비교적 안정되게 생활할 정도의 녹봉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렸을지 모른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조선시대 제일 관등인 정1품,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대법원장, 국회의장 같은 최고로 높은 공직자의 녹봉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쌀 64석, 보리 10석, 콩23석, 면포 21필이었다. 이 정도면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만한 녹봉일 것이다. 그러나 양반가의 2대 예의 중 하나인 접빈객을 하려면 그 역시 태부족이었을 것이다. 정1품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문하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될 것이라 보았을 때 청백리가 아니고서는 역시 녹봉만으로 생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 녹봉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이 정도가 되었다.



최국선 공이 한양에서 벼슬할 때 유형원 선생이 활동하고 실사구시 풍 학문이 서서히 발전할 시기였다.

여하간 최국선 공은 녹봉으로 연명은 할 수 있어도 부자로 살기 힘들다는 계산을 한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어차피 높은 관직에 나가지 못할 양이면 한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다른 방도를 찾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조선의 성리학에 한창 실사구시 학풍이 불어닥칠 때이다. 국선 할아버지가 한양살이를 할 때만 해도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 선생 등이 비록 벼슬길에 올라 있지는 않았으나 명성을 떨칠 때였으니 이런 영향을 적잖이 받았을 것이다.

경주 최부자댁 책을 쓰면서 내가 매우 중요하게 본 것은 실상 유형원 선생이다. 최국선 공이 한양에 있었을 시기와 반계 선생이 한양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기가 절묘하게 겹친다. 최국선 공은 1631년 생으로 한창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할 당시에 반계 선생은 진사시에 합격(1654)하고 당시의 과거제에 대한 폐단에 혐오를 느끼고 벼슬살이를 스스로 포기한 인물이다. 이때부터 실사구시적 학문을 섭렵하며 정치, 경제, 국방, 지리, 세제, 농경, 상공을 섭렵하며 이른바 실학의 선구자로 입신하게 된다.

한양은 지금의 서울과 달리 인구가 20여 만 정도로 더구나 그 시대 어지간히 이름을 얻거나 어지간한 벼슬만 살아도 온 성내 사람들이 다 알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좁을 때였다. 그러니 최국선 공이 반계 선생을 알았거나 적어도 실사구시 학풍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최국선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다음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과감히 이앙법을 도입해 누구보다 빠른 시간에 부자 반열에 오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이앙법인에 이것은 실사구시 학풍의 농사 지식이 없었다면 애초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농사법이었다.

내가 경주최부자댁과 관련한 텍스트라 할 수 있는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를 쓴 이후 최부자댁 선조들과 관련해 다양한 소설을 꾸미면서 최국선 공과 유형원 선생과 관련해서도 소설을 써두었다. 최국선 공이 낙향한 후 실천했던 황무지 개간이나 이앙법, 특히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획기적인 ‘단갈림(반분작)’을 결행한 일련의 사실들을 보면 최국선 공은 완벽한 실사구시 실행자라 할 수 있다. 

유형원 선생과 직접 만났을 가능성이 그만큼 크고 만약 직접 만나지 않았어도 한양에 만연하고 있는 실사구시 학풍을 마음껏 경험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런 차별성이 아니었다면 최국선 공이 본격적인 부자 시대를 열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적 의미로 최국선 공에게 바로 그 확실한 차별성이 있었기에 ‘청부’라는 깨끗한 이름으로 이후 10대의 탄탄한 부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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