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국도에서 만나는 신라 유적

통일신라시대 서역교류 알려주는 근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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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년 전 울산 개운포(울산시 남구 황성동)는 고대 신라 수도 서라벌의 관문이었다.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헌강왕이 처용을 만난 곳도 개운포였다. 개운포에서 시작한 길은 울산 반구동 유적지를 지나 울산과 경주의 경계에 있는 관문성으로 향한 뒤 서라벌로 이어졌다. 지금의 7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처용과 헌강왕이 함께 걸었고 각종 이역(異域) 문물이 지나갔을 이 길엔, 경주 도심에 있는 유적처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1천여년 전 신라 유적이 즐비하다.

↑↑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탑에 새긴 빼어난 수준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눈길을 끈다.


국가 안녕 기원한 호국사찰…원원사지

지난 회차에서 소개한 관문성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경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모화역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모화불고기단지’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동쪽 산속으로 들어가면 원원사(遠願寺)에 닿는다.

원원사는 밀교(密敎)의 대표적 승려 명량법사가 세운 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중심도량이었다고 한다.

문두루비법은 명랑법사가 당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행한 것으로 알려진 주술적인 밀교 의식이었다. ‘관정경’(밀교 경전)에 나오는 주술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설치한 뒤 주문을 외우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이다.

삼국 통일은 이뤘지만 한반도 지배를 노리던 당나라가 큰 골칫거리였던 문무왕 재위 시절(661~681). 명랑법사는 화급한 상황에서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당나라군을 670년과 671년 두 차례 격퇴시키며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문무왕 19년(679)에 이 절을 고쳐 지어 사천왕사라고 했다는 게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원원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이에 대해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명랑의 제자와 김유신 등이 뜻을 모아 세웠고, 왜구의 침입로인 관문성 근처에 위치하며, 사천왕사·금강사와 함께 문두루비법의 중심 사찰이었다는 점으로 미뤄 ‘호국 불교’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먼(遠) 소원(願)을 빈다’는 ‘원원’이란 사찰명도, 나라의 안녕을 바란 김유신 등의 마음이 담긴 이름이 아니었을까.

이곳엔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높이 7m 규모 쌍탑 2기가 남아 있다. 보물 제1429호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일본 건축학자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쓰러지고 묻혀 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은 빼어난 수준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자랑한다. 사천왕상은 사방을 지키고, 십이지신상은 열두 방위를 수호하는 형세다. 탑에 십이지신상을 새기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지금의 원원사는 1970년대에 영호스님이 새로 지은 천태종 사찰이다. 시찰 건물 위쪽 쌍탑이 서있는 곳 뒤편이 옛 대웅전이 있던 자리다.


↑↑ 불국사역 인근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 신라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네모꼴 형태를 지닌 통일신라시대 무덤이다. (제공: 문화재청)


서역인 닮은 무인상의 미스테리…괘릉

원원사에서 도로를 따라 경주방향으로 10㎞ 정도 가면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인 괘릉(掛陵)이 나온다. 무덤 입구에 서역인(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는 무인상으로 널리 알려진 왕릉이다.

이 무덤 자리는 본래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절은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인 파진찬 김원량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건물로 지었다. 그 뒤 불상을 봉안하고 경전을 담은 윤장대를 세워 절로 바꿨는데, 절 주변에 있는 바위가 고니 모양처럼 생겨서 곡사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798년(원성왕 14) 왕은 자신의 장례 절차와 관련한 조서를 통해 번거롭게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들지 말고 지세를 따라 무덤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원성왕이 세상을 떠난 뒤, 담당 관서는 곡사를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조성한다. 그러나 봉분이 놓일 자리가 절의 연못 터였던 탓에 땅을 메우는 과정에서 계속 물이 솟아나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람들은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어 허공에 안치했다. ‘능을 걸다’라는 의미의 괘릉(掛陵)이란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 2014년 진품 비편을 본떠 만든 숭복사비.


괘릉 조성 때 통째로 옮겨진 사찰 터…숭복사지


괘릉에서 2㎞ 정도 떨어진 외동읍 말방리엔 숭복사지가 있다. 798년 괘릉을 조성하면서 통째로 옮겨진 사찰인 곡사가 있던 자리다. 곡사란 이름이 숭복사로 바뀐 것은 헌강왕 때인 885년의 일이다.

곡사가 이곳으로 옮겨지고 60여년이 지난 경문왕 즉위 2년인 862년. 경문왕은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곡사를 주목하고 중창불사를 계획한다. 하지만 곡사의 중창은 쉽게 시작되지 못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865년 어느 날 경문왕은 꿈에서 원성왕을 만나 중창 불사에 대한 허락을 받게 되고, 허비한 3년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중창 불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경문왕의 곡사 중창은 그동안 왕위 계승을 두고 대립하고 갈등했던 여러 정치 세력들을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어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아들인 헌강왕 때에도 곡사에선 또 다른 불사가 추진됐다. 헌강왕은 재위 11년(885)에 곡사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면서 국가가 관할하는 정법사에 예속시키고, 보살과 관리를 파견해 재정을 돌봤다. 곡사를 중창했던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면서, 대숭복사와 왕실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려고 하려는 의도였다.

이듬해인 886년엔 최치원에게 명해 숭복사비의 비문을 짓도록 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인 ‘대숭복사비명’이다. 경문왕의 곡사 중창과 헌강왕의 대숭복사 개창 내용을 담았다. 비는 진성여왕 때에 완성됐다.

지금의 절터 한편엔 2014년 진품 비편을 본떠 만든 숭복사비가 서있다. 비편과 비를 짊어지고 있던 쌍귀부(雙龜趺)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감산사지, 구정동 방형분도 눈길

괘릉리를 관통해 산을 향해가는 길 끝엔 감산사지가 있다. 성덕왕 18년인 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여러 친족 및 일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터다. 10여년 전만 해도 빈 터에 작은 불당과 3층 석탑만 있었다던 이곳엔 제법 큰 규모의 절집이 들어서 있다.

감산사지는 1915년 한 일본인에 의해 알려졌다. 당시 감산사지에서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석조아미타불상(국보 제82호)이 발견되었는데, 두 불상의 광배 뒷면에 절의 창건 시대와 배경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불상은 발견 당시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무너진 채 절터를 지키고 있던 탑은 1965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하는데 상당히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국사역 인근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도 눈여겨볼만한 유적이다. 신라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네모꼴(방형) 형태를 지닌 통일신라시대 무덤이다. 방형 구조는 고구려 고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양식인데, 이런 이유로 이 무덤의 주인 또한 고구려 출신이거나 그 후손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1977년 이 무덤 주변에서 출토된 모서리기둥이 유명하다. 네모난 봉분 각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던 돌기둥으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기둥 한쪽 면엔 수염이 덥수룩하고, 눈이 깊고 코가 큰 이국적 모습의 인물상이 폴로 스틱을 들고 있다. 돌기둥 다른 한 면에는 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괘릉의 무인상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등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서역의 교류를 알려주는 증거로 꼽힌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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