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묘제 날, 산을 하얗게 덮은 사람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작은 행사와도 같던 최부자댁 ‘묘제’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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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모습.

↑↑ 박근영 작가
두두리출판기획 대표
경주최부자댁 이야기를 쓰면서 드러난 이야기들보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말 감동스러운 이야기들을 자주 만났다. 특히 나눔에 대한 경주최부자 가문의 ‘은근한 배려’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견할 때면 새삼스럽게 이 작업의 중요함과 보람을 느끼곤 했다. 물론 이런 숨겨진 이야기들은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기반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최준 선생님의 후계자로 키워지며 가풍(家風)을 하나하나 물려받게 되었던 최염 선생님은 자신의 인생 전반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풍을 전승하셨기에 오히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돋보이는 이야기인지를 구분하지 않으신 채 살아오신 듯했다. 경주최부자 종손으로 평생동안 숱한 인터뷰를 하시면서도 이런 감추어진 이야기를 꺼낸 적이 거의 없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4년 넘도록 선생님을 모시고 ‘미주알고주알’ 선생님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집안의 이야기를 여쭈어본 것이 이런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중 하나가 묘제에 얽힌 이야기다.



산지기는 대를 이었고 경작권도 있어 여느 부자 못지않게 잘 사는 산지기도 있었다. 그들이 묘제를 정성껏 모셨다.

“어릴 때 묘제를 따라다니면 산이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대부분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어서 그랬지”

이 말씀을 하시던 최염 선생님의 눈빛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시기도 한 것처럼 어린 듯 취한 듯 보였다.

“할아버지 모시고 다니는 것은 정말 힘들고 가끔씩 귀찮게 여겨졌다네. 특히 한식이나 추석 등 성묘를 해야 할 시기에는 그 번거로움이란 게 말할 수 없이 컸어. 요즘은 4대 봉사(封祀)가 가정의례 준칙으로 보편화 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5대 봉사는 기본이었어. 원래는 사대부는 4대 봉사를 국법으로 정했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특별히 편법으로 5대를 지냈네. 더군다나 정무공 할아버지는 불천위셨지. 그러면 6대 봉사가 되었네”

보통 4대 제사가 지나고 나면 매혼(埋魂), 즉 혼을 땅에 묻는 의식을 지낸다. 이때 ‘앞으로는 기제사는 못 지낸다’고 고하고 다음부터는 묘사만 지낸다. 그러나 최부자댁에서는 작은댁에 위폐를 옮겨서(이것을 ‘채천(遞遷)이라고 한다) 한 대를 더 지냈다고 한다. 최부자댁 제사는 위의 설명처럼 5대와 불천위이신 정무공 등 조부모 내외는 물론 중간에 재취로 오신 분들의 제사도 있어 문자 그대로 일 년 열두 달이 제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아마 묘제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조상님들의 산소를 다 돌보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최부자댁 조상님들의 산소 몇 곳을 직접 돌아본 적이 있었는데 이곳저곳 분산되어 모셔진 조상님들의 묘는 옮겨 다니는 자체로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졌다.

최부자댁 산소는 가깝게는 이조리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영천 접경과 울산까지 퍼져 있다. 이조리에 전래의 선산이 있었으나 최부자댁 가주들은 명당이라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조상님들의 묘를 썼고 그 산들 역시 선산으로 여겼다. 각 산소가 속한 산은 따로 산지기들을 임명해 관리해 조상님들의 묘는 언제 찾아가도 늘 정갈하게 손질되었다. 따라서 특별히 지시하지 않아도 묘제 지내는 시기가 되면 산지기들이 미리 제수용 음식들을 다 준비해 놓고 최부자댁 사람들은 몸만 가면 되는 식이었다.

“당시 우리 집안에 속한 산의 산지기들은 다른 집 산지기들에게 비해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었네. 그 특혜란 산지기를 대물림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 산지기를 우습게 볼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산지기로 임명되는 것만 해도 커다란 특혜였네. 또 산지기에 상당히 많은 권한을 주어 산을 경작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었고 유실수나 약초를 재배할 수도 있었지. 보통 우리 집안의 산은 작은 것이라도 몇십만 평 이상 되었으니 이런 산을 관리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농토를 경작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했고 실제로 여느 부자 못지않게 잘 사는 산지기도 있었어요”

이렇듯 큰 허물이 없는 한 산지기의 권한을 대를 이어가면서 인정해 주었으므로 최부자댁 산지기들은 정성을 다해서 산을 관리하고 그만큼 최부자댁에 대한 충성심도 높았다. 그러니 조상님들 묘소를 관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제수용품도 미리 알아서 다 챙겨놓는 것이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산을 하얗게 덮은 사람들은 바로 이 묘제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최부자댁에서 언제 어디서 묘제를 지낸다고 하면 그 소문은 며칠 전부터 인근 동리에 짜하게 퍼졌다. 그러면 묘제 시간에 맞추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백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산소 근처에 몰려들었다. 묘제를 기다려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유명한 최부잣집 묘제인 만큼 떡 한 조각, 고기 한 조각, 과일 몇개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였다.

“처음 그 하얀 산을 보았을 때, 내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네. 나는 굶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 했고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몰랐어. 더구나 부잣집 주손의 입장에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 낯선 풍경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지도 몰랐지...”



할아버지는 묘제보다 사람들에게 음식 나누어 주는 일에 더 신경 쓰셨어요. 묘제가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달려들었지!

최염 선생님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 최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고 한다.

“담벼락 안에만 갇혀 살면 담벼락 너머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른다. 너는 늘 담벼락 바깥을 보려고 해야 한다”

“밥알 한 알도 허투루 버려서는 안 된다. 땀 흘려 농사짓는 사람들의 정성도 중하지만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들에게는 금쪽같은 곡식이다”

최염 선생님은 어릴 때는 그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철이 들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고 늘 조심스런 마음을 가졌다고 회고하셨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사람들이 체면치레한다며 한 술씩 밥을 남기는 풍습을 매우 잘 못 된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네. 먹지 못할 밥은 미리 덜어 놓아야 다른 사람들이 깨끗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여기셨어요. 상도 반드시 먹을 만큼만 차리도록 했는데..., 이것은 손님들에게 일일이 외상(外床)을 차려 내놓던 우리 집안의 오랜 풍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 손님 대접을 누구보다 중히 여긴 조상님들이라도 음식을 남겨서 버릴 바에는 차라리 모자라는 편이 낫다고 여기신 거지”

우리나라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춘궁기 혹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만큼 가난했다. 춘궁기나 보릿고개는 보리가 나기 전인 봄 무렵에 양식이 떨어져 곤란을 겪는 시기를 말한다. 그 이전 조선시대 말엽이나 대한제국 시절, 일제강점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유민이 횡행하던 시기다. 유민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떠도는 사람들이다.

이런 시기 최부자댁에서 묘제를 지낸다고 하면 우선은 그 동리의 식솔들부터 시작해서 이웃 동리에서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 모여들었다고 한다. 여기에 유민들까지 몰려와 묘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상황을 익히 아는 산지기이기에 처음부터 음식을 넉넉하게 차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에 그날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빈손으로 돌아가면 이것은 큰일 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할아버지는 묘제보다 사람들에게 음식 나누어 주는 일에 더 신경 쓰셨네. 묘제가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달려들어 떼에 전 손을 내미는 사람들..., 거기에는 염치고 뭐고가 없었어. 그저 배고픔을 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만 남아 있을 뿐..., 그들 중에는 음식을 받고도 돌아서서 모른 척 다시 받아 가려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들의 음식을 억지로 빼앗으려는 사람도 보였고 음식을 받자마자 어디론가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도 보였어요. 배고픔이 사람을 황폐화시킨다는 것을 거기서 보았지...!”

‘사방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염 선생님은 어린 시절 묘제에 따라다니시면서 조상님들의 가훈을 실감했다고 회고하셨다. 그 많은 사람들이 내민 더러운 손에 쥐어졌던 묘제 음식들은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이어가는 깊은 배려가 서린 것이었다. 묘제는 조상님들 모시는 핑계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작은 행사였던 것이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는 묘제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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