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옥적(玉笛), 경주의 상징[2] 문학 작품속의 옥적

‘동경잡기’속의 경주옥적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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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옥적을 주제로 한 시가 다량 수록돼있는 ‘동경잡기’(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를 찾은 조선 시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경주 옥적에 대한 문장과 시를 남겼다. 첨성대, 반월성, 봉황대, 금오산 등 경주의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옥적을 빼놓지 않고 노래하였다. 그들은 왜 문장 속으로 옥적을 불러들였을까? ‘동경잡기’에 수록된 시들을 한 문장씩 언급해 본다.

풍월을 읊던 신선들 어디 갔는지
관문에는 옥적 소리만 슬프네
/오봉 이호민

주렴 걷으니 산빛은 그림 같고
옥적 소리에 해는 중천이네
/가정 이곡

반월성 가운데 첨성대가 우뚝한데
옥적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잠재운 듯
/포은 정선생

하나의 옥적은 언제 만들어졌는가?
관현 소리도 아니고
금속 소리도 아니네
/박원형

정교히 뚫린 여섯 구멍에 별이 쏟아지듯
현악과 화음하고 금석과 잘 어울려
청아한 그 소리에 연주장이 고요하네
/이석형

생각하노니 의풍루 위 밝은 달밤에
옥적의 여운 곡조 참으로 맑았지
/김구용

천년 고관들 사적은 적막한데
한가로운 옥적 소리 아직도 호화롭구나
/정효상

누런 잎이 서풍에 드날릴 때
옥적 소리 멈추고 왕기王氣도 끊어졌다
/최숙정

금오산 달 밝으니 천기가 새로운데
옥적 한 곡조에 대들보 티끌이 움직인다
/어세겸

외로운 산에 해지니
금선(金仙)의 그림자이고
옛 성루에 가을이 깊어
옥적 소리일세
/서거정

황금 수레를 타고
스스로 항복한 임금은 누구이며
옥적을 그대로 전하며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서거정

이외에도 청우 안필(1838~1912), 갈산 권종락(1745~1819) 등이 있고,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특히 박원형과 이석형은 옥적을 소재로 장문의 아름다운 시를 남겼는데 기회가 되면 다 같이 읽어볼 수 있도록 옮겨 적고 싶다. 당주 박종(1735~1793)은 경주를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인 ‘동경유록’에서 비교적 옥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동경잡기(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매월당 김시습

그런가 하면 경주 남산에 7년 가까이 기거한 매월당 김시습 역시 옥적을 두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시 「월야문옥적(月夜聞玉笛)」 에서 폐도 서라벌의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누가 옥피리를 부는가
가을 바람 타고 온갖 감회가 이네
誰橫玉笛暗飛聲 散入秋風百感生

그 가락은 높아 구름 속에 아득하고
그 음절은 느릿느릿 달빛 타고 흐르네
詞腦調高雲渺渺 羅候歌緩月盈盈

서리 내린 포석정에 신라의 꿈은 다하고
잎 지는 계림에 별은 빛나네
霜粘鮑石衣冠盡 木落鷄林星斗明

이것이 애를 끊는 단장곡인가
아니면 고향을 그리는 그 곡조인가.
不是欲吹腸斷曲 故城淸夜更關情



위에서 언급한 여러 편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옥적을 통해 옛 신라 고도의 애잔함을 공통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옥적을 매개로 해서 그리움과 슬픔을 노래하고자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도 그러할 것이 옥적 만큼이나 슬픔을 표현할 악기가 몇이나 될까?

↑↑ 신라시대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 토우.(황남동 출토)


다산 정약용 「계림옥적변 鷄林玉笛辨」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 제1집 제12권 시문집 편에는 「계림옥적변鷄林玉笛辨」 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경주(慶州)에 옥적(玉笛, 옥피리) 한 자루가 있는데, 신라(新羅)의 유물(遺物)이다. 다른 사람이 불면 소리가 나지 않고, 오직 경주의 악공만이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악공이 소리를 잘 내게 되면 다른 악공들은 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그 악공이 죽은 뒤에야 그의 대를 이어 소리를 낼 수 있는 자가 나왔다고 한다. 나라에서 일찍이 시험 삼아 옥적의 소리를 잘 낼 수 있는 자를 부른 적이 있는데, 올라오는 길에서 연주할 때는 그 소리가 크고도 깨끗하였다. 그러나 조령(鳥嶺)의 북쪽에 이르자 갑자기 옥적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울에 이른 뒤에 많은 상금(賞金)을 걸어 놓고 소리를 내게 하였으나, 끝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에 옥적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했는데, 조령 남쪽에 도착하여 불어 보니 예전처럼 다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신령스럽고 기이하여 따져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하 생략)

지면상 내용을 모두 인용할 수 없지만, 다산은 죽령 이북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옥적을 돌려주지도 않고 왕실에 붙잡혀 있을 것을 염려한 악공이 꾸며낸 말이라고 했다. 풀이 바람에 따라 쏠리듯 사람들이 들은 말을 믿기만 하고 이치를 탐구하지 않는다고 교훈적 말을 덧붙인 것은 다산이 세상에 이르는 훈계이었다.


박목월의 시와 편지

옥적은 목월에게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시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옥피리」 라는 제목의 짧은 시가 있다.



물살 흐르는
졸음 곁에
하얀히 삭아서
스며오른 목숨발

내 색시는 하얀 넋
천만년 달밤
이슬 하늘 찬 달빛에
높이 운다



그리고 목월이 조지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도 옥적이 등장한다. 언제 경주로 한번 오라고 초대하는 편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경주 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 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동부금융조합 바로 근처에 경주박물관(현 문화원)이 있었다. 그곳에 옥적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자주 보러 갔던 것 같다. 편지 속 산수유는 현재 연명치료 중인 노인같지만 지난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워올렸다. 아슬아슬한듯하지만 올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산수유꽃 피는 봄날 문화원 뜰에서 옥적 소리를 들으면 제격일 것이다.


↑↑ 초정 김상옥의 시집 ‘초적’(고려대 도서관 소장)


초정 김상옥의 시조 「옥저(玉笛)」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와 민족 정서, 혼을 노래한 시조 시인 초정 김상옥 또한 신라 옥적을 노래했다. 특히, 시인은 경주를 가장 많이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첫 작품집인 『초적(草笛)』에 수록된 「옥저(玉笛)」는 그의 대표 시 가운데 한 편이다.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년을 머금은 채,
따스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요



이 시는 1948년 김세형이 작곡한 가곡 「옥저」가 많이 불러 지고 있다. 국악가 김영동에 의해 만들어진 국악곡 「옥저」도 있다. 오늘날엔 옥적 소리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지만, 문학 작품으로, 음악으로 재탄생 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경주는 피리의 도시다.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잠재워주는 만파식적, 가던 달을 멈추게 했던 월명사(月明師)의 피리, 그리고 경주를 떠나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경주의 자존심 옥적이야말로 경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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