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자타 공인 한국 최고 문화유산의 그늘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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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실에서 본 석굴암 내부전경(故 한석홍 기증 사진). <제공: 문화재청>

1907년을 즈음해, 경주의 한 우체부는 토함산을 넘어 우편배달을 가다가 우연히 폐허 상태의 유적을 발견한다.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던 이 유적은 바로 국보이자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석굴암’이다. 나비 표본을 찾아 캄보디아의 정글로 들어갔다가 ‘앙코르 와트’를 발견하게 됐다는 프랑스인 앙리 무오를 연상시킬 만큼 극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 발견’ 이야기는 허구

사실 이 이야기는 허구에 가까운 듯하다. 물론 석굴암은 조선시대에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3세기 ‘삼국유사’에 언급된 후 17세기에 몇몇 기행문과 시가 나오기까지 약 400년간 석굴암과 관련된 기록은 전무했다.

하지만 석굴암은 조성된 이래 항상 토함산에 있었고, 폐굴이 되었던 것도, 밀림에 묻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적지 않은 선비들이 석굴암을 다녀갔다. 불국사 인근에선 중요한 날에 토함산에 올라 예불을 올리고 공양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다만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아래 글은 조선시대 문인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기록이다.

“석굴암에 이르렀다. 암자의 명해(明海)스님이 맞이하여 들어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석굴로 올라갔다. 모두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석문(石門) 밖 양쪽에는 커다란 돌에 새긴 불상이 각각 네다섯 개 있는데, 기교하기가 짝이 없다. 석문은 잘 연마된 무지개 형태이다. 그 속에 있는 커다란 석불은 엄연하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대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균형이 잡히고 기교하다. 굴속 위쪽의 덮개돌과 여러 천장돌은 기울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배열된 불상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고 기괴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정시한은 1688년 5월 15일 석굴암을 방문한 뒤 기행문 ‘산중일기’(山中日記)에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가 목격한 석굴암의 모습은 전실(前室)과 성소(聖所), 그것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뤄져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기와지붕으로 덮여있는 지금의 전실이 당시에는 상부에 아무것도 없는 노출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정시한의 이 기록은 당시 석굴암의 모습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 도구로 활용

석굴암의 조성 당시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이곳에선 옛 이름이 석불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통일신라시대 ‘石佛(석불)’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하지만 조성 배경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명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석불사의 조성 배경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확인된다. 김대성(金大城)이 751년에 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의 부모를 위해 각각 석불사와 불국사(佛國寺)를 조성하다가 774년에 그가 죽자 국가에서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석불사 불교 존상들의 조형적인 특징이 8세기 중엽을 가리키고 있어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불사가 모두 김대성 집안의 원찰과 관련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며, 그 규모로 볼 때 그가 이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佛事)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대표적 견해다.

석굴암의 미학적 아름다움엔 이견이 없지만, 석굴암이 20세기 초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관광명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일제의 영향이 컸다. 일제는 1913년부터 3년간 석굴암을 완전 해체·복원하고(1차 공사),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가 그랬듯, 석굴암도 제국주의의 ‘발견’에 의해 식민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1930년대에 들면 우리 스스로도 “영국이 인도를 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석굴암 불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석굴암 ‘붐’이 일어난다.

석굴암을 불우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대조되는 ‘과거의 영화’로 내세우고, 일본의 기술로 발견·수리·복원했다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부연하자면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 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인식, 문명화된 일본이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수함으로써 석굴암의 옛 영화를 찾아줬다는 인식을 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일제는 서구에 맞서 자신들을 ‘동양’의 중심으로, 고대 인도와 중국에서 전해진 불교·유교·예술을 모두 소유하고 보존한 ‘아시아 문명의 보고’로 자리매김하도록 애썼다. 일본에서 꽃피운 문화의 중간과정인 ‘석굴암’의 훌륭함을 증명할수록 일본 문화 또한 훌륭해지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그리스~간다라~통일신라’의 불상 전파 경로는 이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서 나온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일제는 ‘석굴암’의 본래 명칭이 ‘석불사’임을 알고도 ‘석굴’을 강조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자랑’이라 홍보했다.

하지만 석굴암은 ‘인조 석굴’로, 암벽을 파고들어간 인도 석굴 양식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인도의 ‘석굴사원’과의 친연성을 강조한 것은, 일본이 불교미술의 정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 석굴암 주실을 덮고 있는 기와지붕. 일제강점기 보수공사 이전인 1910년 전후 사진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차례 보수공사로 훼손

이 과정에서 수난도 적지 않았다. 현재 석굴암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총 3차례, 1960년대에 한 차례 보수·복원공사를 거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수리하면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천장 외부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어 씌웠다. 석굴암을 콘크리트 돔 구조물로 바꿔버린 것이다.

1961~1964년엔 우리 정부가 석굴암을 보수했다. 이 보수공사에서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 외부에 또 한 겹의 콘크리트층을 만들어 씌웠다. 석굴암을 현대식 콘크리트로 완전히 밀봉해 버린 것이다.

이 같은 수차례의 황당한 보수공사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가 커져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이 발생했다. 급기야는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태로 석굴암을 개방해 왔고 급기야 석굴암의 보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76년 12월 유리문을 설치한 것이다.

지금도 석굴암은 유리문으로 막혀 있다. 그래서 석굴암에 가면 늘 아쉽다.

관람객들은 유리문 앞에서 전실과 주실 쪽을 기웃거리다 이내 밖으로 빠져나간다. 여기저기 엉뚱한 것들이 유리에 반사돼 석굴암의 진면목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전실의 팔부중상에 조명까지 뒤섞여 관람을 심하게 방해한다. 내부 공간의 구조도 경험할 수 없다. 게다가 유리문의 알루미늄 새시 틀이 석굴암의 품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참 아쉬운 풍경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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