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선 공, 신의 두 수, 모내기와 단갈림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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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부자의 초석을 닦은 최국선 공의 묘.

↑↑ 박근영 작가
이제 본격적으로 부자가 된 경주최부자 이야기를 해 보겠다. 지난 1619호 신문에서 최부자댁 부자의 비결인 이앙법과 단갈림을 잠깐 소개했는데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등 잇따른 국제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세종대왕 이래 건재하던 농경지가 상당 부분 황폐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최국선 공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광해군 이후 임금들은 전답을 복구하고 토지를 늘이는 정책을 적극 시행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토지개간사업이다. 최국선 공은 바로 이 사업을 눈여겨보고 경주 이조 본가로 낙향한다.

당시의 토지개간사업은 근래의 경제개발계획과 같은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다. 개간을 원하는 양민들에게는 마소와 쟁기, 기타 농기구까지 빌려 줄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개간한 땅의 소유권을 개간자에게 주는’ 아주 매력적인 특혜를 부여했다.

모내기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농사법이었지만 쉽게 시행하지 않았다.
게다가 광해군 이후 시작된 대동법이 효종과 현종, 숙종 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안착해 가고 있을 때였다.

대동법은 이전의 특산물 공물, 물품 조세 등을 한 데 묶어서 한결 당 조세를 쌀 12말로 통일시켜 세금의 지표를 통일하고 세부담을 줄인, 요즘 말로 이른바 ‘친서민 정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자면 자연스럽게 쌀의 생산을 늘려야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 토지개간사업은 더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그러나 기득권인 양반층이나 부농들은 이 토지개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조정의 시책과 상관없이 소작인들로부터 소출의 8할 이상을 거둬 배를 불릴 수 있었으니 굳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까지 토지를 늘릴 필요가 없었다.

이럴 때 최국선 공은 적극적으로 개간 사업에 뛰어들어 토지를 늘려나갔다. 최부자댁이 부자가 된 것을 일컬어 청부(靑富)라는 말했는데 그 근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을 늘렸지만 법을 어기거나 나쁜 방법으로 늘리지 않고 개간을 통해 조금씩 넓혀 나간 것을 기본으로 삼았고 그것을 유지하는데도 올바른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특히 이렇게 개간한 후 그 농토에 ‘이앙법’을 시작한 것은 최국선 공이 부자가 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세종대왕 때 간행된 ‘농사직설’이란 책이 효종 대에 이르러 ‘농가집성’이라는 훨씬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책으로 발전하여 퇴비를 하는 방법,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 지력을 좋게 하는 방법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는데 일찍부터 한양에서 벼슬 살면서 견문을 넓힌 최국선 공은 그런 선진적인 기술을 편견 없이 과감히 도입하여 소출을 늘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기술이 이앙법(移秧法)이었다. 이앙법은 말 그대로 옮겨심기, 즉 모내기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보편화된 이 농사법은 농사직설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만 해도 크게 성행하지 않던 방법이었다.

당시는 대부분 논에 볍씨를 무작위로 뿌려서 나는 대로 거두어들이는 직파법(直派法)이 성행하였던 것.

그런 시대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내기를 시행한 것에서 최국선 공의 과감한 결단력을 볼 수 있다. 모내기의 장점은 벼를 적절히 심어 벼의 성장환경을 좋게 해 벼 밑동을 튼튼히 하고 성장에 좋은 영향을 줌으로써 풍수해와 병충해에 강하게 하고 고른 간격의 파종으로 잡초를 제거하기 쉬운 점 등이다. 최국선 공은 모내기로 같은 면적의 직파법에 비해 3배 이상의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모내기로 인해 이모작이 가능하게 한 것도 또 다른 성과였다. 이전까지는 한 해에 벼농사 한 번 짓거나 보리 농사 혹은 다른 잡곡이나 작물을 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모내기는 봄에 보리농사를 짓는 한쪽에 미리 물을 대고 모내기할 정도의 묘판만큼만 모를 심어 놓았다가 보리 추수 후 바로 보리밭을 갈아엎고 물을 댄 후 이미 자라있는 모를 옮겨 심을 수 있었다. 논의 활용도가 2배가 된 셈이었다.

50:50의 분배법인 단갈림은 경주최부자가 최초로 시행한 파격적인 소작료 분배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재배법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한 부의 요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단갈림’이다.

최부자댁은 경주 인근에서 처음으로,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소출 분배에서 ‘단갈림’을 시행한 집안이다. 단갈림이란 지주와 소작인이 소출을 똑같이 2등분으로 나누는 것을 뜻한다.

요즘 말로 50:50, 이 분배법을 최국선 공이 처음 시작해 이후 최부자댁의 확고한 전통이 되었다.

당시의 분배 관례는 지주가 소출의 7~8할 심지어는 9할을 가져가던 시대였다. 아주 인심이 좋은 지주는 7할을 떼갔고 보통은 8할, 야박한 곳은 9할까지 떼갔던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 소작농들은 뼛골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가난을 면하기는커녕 그해의 수확으로 그해 겨울을 넘기지도 못해 12월만 넘어도 장리쌀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면 지주들은 장리도 모자라 곱장리를 주면서 배를 불렸다.

장리란 쌀이나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때 이자를 쳐서 갚게 하는 것으로 곱장리란 섣달에 한 가마니의 곡식을 빌리면 이듬해 8월 추수 때 배인 두 가마를 갚도록 하는 셈법이다. 그나마도 장리나 곱장리를 얻을 수 있는 소작농은 신용이 좋았던 사람들이었으니 그렇지도 못한 소작인들은 유민으로 떠돌거나 화적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최부자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처음 단갈림을 감행했을 때, 최국선 공은 주변 지주들의 비난을 많이 들었다.

최부자댁 단갈림이 다른 지주들의 배분율까지 낮추어 놓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쉽사리 단갈림 하는 지주도 없었을뿐더러 그 이후에도 단갈림 하는 지주는 최부자댁이 유일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 단갈림에 지주들이 얼마나 인색했으면 1931년 동아일보에 경남 진영지방 농민들이 추수기에 벼를 베지 않으면서 지주들에게 단갈림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다. 이것 하나만 봐도 조선 중기부터 단갈림을 시행한 최부자댁 선조들이 얼마나 획기적인 소작료 분배 방법을 선택했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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