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부훈도 김련 처 김씨지여각<烈婦訓導 金鍊 妻 金氏之閭閣>

이상욱 기자 / 2024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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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 서악동 선도산 자락에 위치한 ‘열부훈도 김련 처 김씨지여각’

서악서원 안쪽마을 충효서악길을 따라 선도산 동쪽 기슭(서악동 447)에 붉은 담장과 한옥 목조로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는 정려각(旌閭閣) 하나가 돋보인다. ‘열부훈도 김련 처 김씨지여각(烈婦訓導 金鍊 妻 金氏之閭閣)’이다. 이번 호에서는 본지 1993년 4월 19일자(제164호)에서 함종혁 선생의 기고와 독자 김인식 씨가 제보한 비석 내용의 주인공 김련과 그의 부인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 서악동에 위치한 김련의 묘와 묘비 모습.


왜적에 굴하지 않고 아들 지켜 낸 ‘부인 김씨’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칼날 앞에서 아들을 지켜낸 김련의 부인 이야기가 정려각 비석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먼저 함종혁 선생의 이 비문에 대한 해석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침범했을 때 남편인 김련은 곽재우와 화왕산성에서 싸우느라 집을 나간 후 행적을 감추게 됐다.

남편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열부 김 씨는 세살난 갓난아이를 안고 남편을 찾아 산길을 통해 찾아가던 중 어느 산중에서 왜적에게 잡혀 그 앞에서 매를 쳤다.

그러나 김 씨는 아이를 안고 죽음에 이르면서까지 왜적에 따르지 아니하니 왜적이 아이를 빼앗아 다른 숲에 숨겨 놓아두고 부인 김 씨를 죽였다. 왜적의 칼날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니 후세인들이 우러러보게 됐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비를 세우라 명했다’고 한다.

다음은 김인식 씨가 알려 준 이 비의 정려비문(旌閭碑文)에 담겨 있는 부인 김씨 이야기다.

‘임진(壬辰, 1592)년 난리에 왜적의 날카로운 기세가 극도로 날래어 고을과 부락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 자취를 감췄다. 당시 김련(金鍊)은 병거(兵車, 전쟁 시 공무수행 수레)로 가서 서울에 있었다. 부인 김씨만 홀로 3세 아이를 데리고 서쪽 골짜기에 숨었는데 적을 만나 잡히자 아이를 안고 소리 내어 슬피 울었다.

적은 아이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두려 하자 앞을 가리고 매를 맞으며 김 씨는 한 발짝도 옮기지 않았다. 마침내 해를 입어 죽게 됐다. 이 같은 사실이 조정에 들리자 이곳 마을에 정려를 세워 부인의 의연함을 모두 알 수 있게 했다’고 전한다.

이 정려비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경주는 적의 길목이었고, 왜군에 의해 희생된 백성들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이들 모두 포상을 내리기 위해 남산을 모두 뒤져 도설(棹楔, 정려)을 세워 숭상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순국한 부인 김씨는 명단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부인 김씨가 운명할 때의 일을 집안에서 대략 적었으나 자세하지 않았고, 정려각(旌閭閣)을 세운 년·월 또한 고찰할 수 없었다는 것.

이를 바로 잡은 것이 김련과 부인 김씨의 후손들이라는 내용이 정려비문에 담겨 있다. 비석의 비명(碑銘)에는 부인의 공적을 높이 기리고 있다.

이 비명은 조선 숙종 때의 영양 남용만이 짓고, 서산 류하현이 썼다.

남편이 어려움을 만남에 자신은 공전(公戰)보다 용맹했고,

종은 아이를 보전하여 충성(忠誠)을 오로지 했네.
(종은 아이를 충심으로 보전했네)

하늘이 열부(烈婦)를 이 땅에 살면서 대비하게 한 것이,
(하늘이 열부를 내고 땅이 도왔는데)

어찌 능히 요란(擾亂)한 병기를 벗어날 수 없게 했는가?
(어찌해서 전란의 칼끝을 벗어 날 수 없었던고?)

한 여자가 사물의 근본인 대강(大綱)을 부지(扶持)했으니,
(아녀자로서 윤리의 큰 벼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이는 백세(百世)(약 3000년)의 공(功)을 세우게 함이네.
(이로 인하여 백세의 공을 세우노라)


↑↑ 정려각 내 김련의 부인의 공적과 비명이 새겨져 있는 비(碑).


임란 때 전공 세운 ‘김련’의 공적도 전해 내려와

김씨 부인이 왜군에 의해 희생될 당시 남편 김련에 대한 업적도 정려비문과 그의 묘비 등에 기록돼있다.

김련의 묘와 묘비 ‘중직대부 예빈시부정 월성 김공지묘(中直大夫 禮賓寺副正 月城 金公之墓)’는 김씨 부인의 정려비와 인접한 서악동에 위치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김련의 휘는 연(鍊)이고 자는 정중(精仲)이며, 호는 사천(沙川)이다. 성은 김, 본관은 월성이며 신라 경순왕 다섯째 아들 대안군 휘 은열(殷說)의 후손이다. 김련은 태어나면서 재주가 특이했고, 성장하자 힘과 용맹이 뛰어났다. 일찍이 유업(儒業)을 익혀 과거에 응시했다.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의병장 곽재우와 화왕산성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켰다. 그의 전공으로 이듬해 유학훈도로 관직에 올랐고, 얼마 되지 않아 종사품인 예빈첨정을 거쳐 종삼품의 ‘중직대부 예빈시부정’까지 관위(官位)가 올라갔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인 ‘용사(龍蛇) 창의록(倡義錄)’에도 김련의 행적이 나온다.

“공(公, 김련)은 낙동강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의병장 곽재우가 (군사를)모집하는데 응해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힘을 다하여 사수(死守)하다 전쟁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왔다”라고 기록돼있다.

김련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공은 여러 명현의 창의록에 기재돼있지만 조정에서 돌아가신 분에게 내린 녹권의 특전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공적 기록에 빠뜨리거나 고증할 수 있는 글이 전란을 겪으면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후손들은 추정하고 있다. 다만, 1962년 여강 이석교가 지은 비명(碑銘)에 의해 김련의 공적을 기리며 후손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 김련의 이름과 공적이 기록돼 있는 ‘용사(龍蛇) 창의록(倡義錄)’.

왕손의 후예로서
문무과 모두 뛰어났다.
임진년 왜란을 당하여
사리(事理)의 취사를 잘 구별하였다.
홍의장군을 도와 책략을 세우며
칼날을 무릅쓰고 전란에 뛰어들었다.
나라 은전으로 예빈시에 올랐고
열부는 진정 의사의 배필이었네.
녹훈이 우연히도 충훈부에 누락됐으나
이름은 찬연히 야사에 실려 전한다.
강상을 바로 세우는 건 충이고
위난을 막은 것은 공이라 말한다.
장산 기슭 해좌 둔덕에
이 비석 무궁히 전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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