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유람 후 상생의 지혜를 확고히 다진 최의기 공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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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들에게도 명소로 알려지는 경주최부자댁.

↑↑ 박근영 작가
지난주 마지막 부분에 쓴 지주 대 소작인의 분배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전과 해방 직후까지도 지주에게 유리하게 분배되다 1950년 토지개혁법이 실시되면서 공식적으로 소작제도 자체가 없어졌다. 그러나 소작농과 소작 행위는 공공연하게 계속 존재했고 전국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이 대거 줄어든 1990년대 이후에는 거꾸로 지주 대 소작농이 30:70으로 나누는 식으로 암암리에 잔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최부자댁 단갈림은 오랜 기간 다른 지주들로서는 양보하기 어려운 분배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남들에 비해 손해인 듯한 이런 정책이 알고 보면 최부자댁을 더 견고하게 이끈 핵심 요인이 되었다. 다른 지주들은 소출의 70~80% 가져 가지만 최부자댁은 달랑 50%만 가져가니 파격적인 것을 떠나 무척 우둔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부자댁의 깊이 있는 복심(腹心)이 숨어 있었다. 최부자댁 가주들은 다른 부자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탁월한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이 계산은 지주 입장이 아닌, 소작인 입장에서 생각해야 풀 수 있는 신비로운 매듭이었다. 그렇다면 소작인들의 속내를 먼저 들여다보자.

최부자댁 땅을 붙이는 소작인들은 다른 지주들의 전답에 비해 최부자댁에서 볼 수 있는 이득이 기본적으로 훨씬 크다는 것을 눈감고도 알고 있었다. 다른 논에서 10석이 나오면 고작 한두 석을 가져 가지만 최부자댁 논에서는 10석이 나오면 5석이나 가져갈 수 있으니 자연히 다른 논에 비해 훨씬 많은 공을 들일 것이다. 이것은 상식 중의 상식,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일이다. 어떤 소작인인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인가?



최부자댁 소작은 단갈림과 모내기 작법 덕분에 다른 논에 비해 5~6배의 효과가 더해졌다

여기에 최부자댁 논에서는 모내기만으로도 다른 논의 소출에 비해 3~4배는 더 많았다. 또 있다. 황무지를 개간했다는 것은 지력이 좋다는 뜻이다.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과 들의 흙은 훨씬 좋은 지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객토와 퇴비 등을 동원한 신기술 농사법도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최부자댁 논에서 얻은 소출만으로 다른 곳 소작 붙이는 효과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더구나 최부자댁은 모내기로 2모작이 가능하니 가을에는 쌀을 얻고 봄에는 보리를 얻을 수 있다. 다른 지주의 농사를 짓는 것보다 5~6배의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런 마당이니 어느 소작인인들 최부자댁 땅을 금이야 옥이야 돌보고 가꾸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농사를 지을 것이다.

이 원리는 거꾸로 최부자댁에도 똑같이 작용한다. 최부자댁 가주들은 모내기라는 특별한 기술과 5:5라는 ‘우둔한’ 분배법으로 소작인들이 혼신을 다 바칠 확실한 명분과 실리를 줌으로써 다른 지주들에 비해 역시 5~6배의 소출을 가져갈 수 있었다. 21세기에나 통용되는 윈윈 전략이 17세기 조선 경상도 경주에서 그 빛을 발한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이점이 있었다. 소작농들은 이웃에 좋은 논이 나면 그 소식을 최부자댁에 제일 먼저 알려 주는 효과도 생겼다. 특히 최부자댁은 논을 판다는 정보를 제공한 소작인에게 그 논을 살 경우 소작권을 주는 것을 당연시했다. 농지에 대한 정보가 최부자댁에 죄다 모일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최부자댁 6훈 중에 ‘흉년에 땅 늘이지 말라’는 귀한 가훈이 있다. 남의 고통을 이용해 부를 늘이지 말라는 최부자댁의 신념이 높이 평가되는 가훈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은 굳이 남의 원망 들으면서 흉년에 땅을 늘리지 않아도 좋은 땅은 언제건 쉽게 쉽게 살 수 있었기에 그런 가훈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땅이 나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알려 줄 소작인들이 즐비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뒤에 문파 선생님이 대구대학을 설립하면서 대학에 기증한 땅의 규모를 알고 새삼스럽게 놀란 적이 있다. 경주 불국사 인근과 울산 일원의 땅이었는데 그 규모가 지금 시세로 수천억 원에 이르렀다. 물론 지금의 잣대로 땅의 시세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지만 그 땅의 넓이만으로도 최부자댁 농토의 방대함을 미루어 짐작할 만했던 것이다. 이렇게 넓은 땅을 가질 수 있으려면 단순한 소문이나 소식 이상의 치밀한 정보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소작인들 사이의 네트워크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운도 좋았다. 최국선 공이 처음 터 잡은 이조리 땅은 이앙법을 실현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경주 서편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세 줄기 물줄기가 희한하게 이조리에서 합쳐지는 곳이다. 형산강 본류가 이조리를 통하고 있고 백운대와 박달 쪽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모두 이조리를 통해 흐른다. 

이런 물길 덕분에 이조리는 어지간해서는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최국선 공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논밭을 만드는 동안 해마다 날씨가 좋아 매년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최국선 공의 탁월한 기술과 노력, 천혜의 조건이 딱딱 맞아 떨어졌고 여기에 공의 인덕과 소작인들의 혼신을 다한 정성이 더했으니 최국선 공이 부자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부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것이고 이로써 최국선 공은 몇 년 만에 2000여석 이상의 상당한 부자가 되었다. 최국선 공이 2천 석지기가 됐을 것이란 것은 최염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만석지기는 아니지만 그 정도 만으로서도 만석지기라는 소문이 났었던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최의기 공은 금강산 유람에서 만난 노승을 통해 상생의 지혜를 배웠다고 전한다. 금강산에는 어떤 인연이 숨어 있었을까?

그러나 최국선 공이 일으킨 부는 그 아랫대에서 해체되면서 부자의 위용을 잃어버릴 뻔했다. 그 이유는 균분상속(均分相續) 때문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상속제도가 맏아들 위주가 아니었고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균분상속제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다음 대에는 각각 수백 석지기로 부가 나누어졌다. 그런데도 부자의 위엄을 지켜 낸 분이 4대 최의기 공이다.

최의기(1653~1722) 공은 최국선 공의 4남 3녀 중 둘째 아들이다. 이분은 양반 관료 사회의 이상에 맞게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거푸 낙방한 후 재산을 모으는 일과 권력을 얻는 일을 두 가지 모두 이룰 수 없다고 각성하고는 공부를 접고 재산을 일구는 일에 전념했다.

최의기 공은 아버지로부터 재산 늘리는 방법을 충분히 배운 모양이다. 게다가 둘째라는 가계의 특성상 봉제사의 의무에서도 한발 물러나 있었기에 훨씬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마침내 아버지를 능가하는 부자가 됐다.

특히 최의기 공은 아버지의 상생 철학이 소작농들과의 소통 정도에 머무른 것을 뛰어넘어 적극적인 상생과 나눔의 정신을 펴나가기 시작했고 일정 부분 이상의 수입에 대해서는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최부자댁 전통을 체계적으로 안착시킨 분이다. 이분에 이르러 최부자댁의 불문율인 육훈(六訓)이 완전히 만들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대강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부자댁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의기 공의 행적 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부를 이룬 후 금강산 유람을 다녀오면서 그곳에서 만난 노승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나눔과 상생 정신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는 부분이었다. 당대에 부를 이루었으니 유람을 즐길만하고 노승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눈여겨본 것이 있다. 

그때 왜 금강산으로 갔을 것이며 금강산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노승은 누구일까 하는 점이다. 이 대목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모티브를 주었고 궁리 끝에 대강의 가설을 하나 세울 수 있었다.

가설이란 이렇다. 당시 최의기 공이 금강산으로 갔던 것은 최진립 장군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진립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많은 인물들과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중 추측되는 한 분이 사명대사(1544~1610)다. 사명대사는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이나 머무른 후 전국을 다니며 불도를 닦았다. 사명대사는 지금의 울산의 도산성 전투에서 최진립 장군과 함께 싸운 분이다. 최진립 장군은 이 도산성 전투에서 일종의 유격대로 활약하며 막중한 공을 세운다. 

당시 울산성에 고립된 일본 장수 카토키요마사(加籐淸正)와 휴전과 관련한 담판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연히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활동했으므로 24세나 위인 사명대사가 최진립 장군에게 적지 않은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최의기 공이 금강산 유람을 떠났던 것은 유람과 함께 이런 선대의 교류를 중히 여겼기 때문으로 보았다. 최의기 공이 금강산을 유람하던 시기, 당대의 고승이라 알려진 분이 설제 스님(1632~1704)이다. 스님은 당시 내금강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명찰 ‘정양사’의 주지였다. 

또 이 시기는 당대 이름을 날리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 세도가 김창집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정선은 뒤에 지금의 포항 인근인 청하현감을 지내며 내연삼용추 등 내연산 폭포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 무렵 경주 인근의 골굴사와 석굴암, 울주의 반구대 그림도 함께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정선 선생이 청하로 오게 된 것이나 경주 인근의 산수를 그린 것이 최의기 공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런 가설은 다분히 가설일 뿐이지만 소설로 쓰기에 매우 재미있는 소재였다. 당연히 그 가설을 바탕으로 한 편의 소설을 써놓았다. 소설 속 최의기 공과 설제스님, 정선 선생은 과연 어떤 일을 벌일까?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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