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수학여행 기억 안고 통일신라 대표 건축물 만난다

멀리서 바라볼 때 서로 다른 두 탑은 완전한 균형과 조화
외세의 침탈과 독립이라는 우리 역사의 수난과 파란 숨어 있어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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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본 불국사. <제공: 문화재청>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는 ‘대한민국 여행 1번지’다. 많은 이들은 ‘경주’라는 두 글자에서 수학여행을 떠올린다. 그 수학여행에서 빠지지 않았던 곳이 불국사다.
매표소에서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불국사로 오르는 길, 학창시절 기억이 가물가물 되살아난다. 대웅전(보물 제1744호)으로 가는 길목의 돌계단 앞에 이르자 기억은 선명해진다.

그때는 챙겨 보지 못한 가람 배치. 동쪽 자하문 앞 계단이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6호),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 앞 계단이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다. 단체 사진을 찍던 청운교와 백운교는 지금도 불국사 인증 사진 명소다.


불교 경전 근거해 치밀하게 세운 사찰

불국사는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힌다.

건축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의 귀족이었던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발원한 사찰이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사찰의 공사는 751년(경덕왕 10)에 시작됐고, 김대성이 완공 전에 생을 달리함에 따라 이후 국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발원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국가의 주도에 의해 완성된, 개인의 소원이자 국가의 원찰로서 기능하는 대규모 사찰인 셈이다.

절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는 김대성이 불국사를 짓기 시작한 751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다리 아래 속세와 위쪽 부처 세계를 이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전체 34계단, 연화교와 칠보교는 18계단이다. 규모는 다르지만 계단 형태로 만든 다리라는 점과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인 점 등은 비슷하다. 전자는 웅장함이, 후자는 섬세함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건너 자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전각이다. 앞쪽으로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대웅전 왼쪽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 뒤로는 중앙의 사원을 지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비로전, 관음보살을 모시는 관음전,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전이 있다.

언뜻 복잡해 보이는 이 구조는 모두 불교 경전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청운교~백운교~자하문~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의 사바세계로 가는 길과 같고, 연화교~칠보교~안양문~극락전으로 이어지는 구조 또한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가는 길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양쪽 돌계단 다리 모두 보존을 위해 출입이 금지된 상태라 옆길을 통해 대웅전으로 가야 한다.


↑↑ 국보 제23호인 청운교와 백운교. <제공: 문화재청>


대웅전 뜰 꽉 채운 두 석탑의 위용

대웅전 뜰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 없는 이라도 두 탑을 보는 순간, 탄성을 내지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탑 모두 국보다. 석가탑의 문화재 명칭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지만, 우리에겐 원래 이름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을 줄여서 부르는 석가탑이 익숙하다.

불국사의 모든 배치가 치밀하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관계다. 쌍탑의 경우 탑의 형태를 같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불국사의 쌍탑은 이례적으로 그 형태가 다르다. 높이는 다보탑 10.29m, 석가탑 10.75m로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확연히 다르다. 동쪽의 다보탑은 특수한 탑 형태를, 서쪽의 석가탑은 일반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오래전 수학여행 때 두 탑 앞에서 어느 게 다보탑이고 석가탑인지 헷갈린다는 학생이 종종 있었다.

선생님은 10원짜리 동전을 꺼내 보이며 “10원짜리 동전에 나오는 탑이 다보탑”라고 하셨다. 요즘 아이들은 10원짜리 동전을 볼 일이 별로 없지만, 1970~1990년대 학생들에게 다보탑은 10원짜리 동전에 나오는 친숙한 탑이다.

이들 두 탑은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묘법연화경 속 견보탑품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경전에 따르면, 다보여래는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하기 위해 보배롭고 아름다운 형상의 탑으로 솟아나 석가모니와 나란히 앉았다고 전해진다.

교리를 설법하는 석가모니는 석가탑의 형태로, 다보여래는 이를 듣는 청중으로서 다보탑의 형태로 지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반면, 석가탑의 경우 다보탑에 비해 조형적 요소가 없는 수수한 형태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반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두 탑에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는 두 탑의 치밀한 설계에서 기인하는데, 두 탑을 받치는 지대석과 기단부의 넓이와 높이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멀리서 바라볼 때 서로 다른 두 탑은 완전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 눈 내린 불국사. <제공: 국립공원공단 경주국립공원사무소>


일제강점기 강탈과 도굴의 아픔 겪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15년 석굴암 공사를 마무리 지은 뒤 심하게 훼손돼 있던 불국사 수리에 집중했다. 보수 공사는 1918년 10월에 시작돼 1925년 9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다. 그 결과 오랜 기간 방치돼 있던 지난날의 불국사는 깔끔하고 단정 모습의 장대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불국사 공사는 미완의 공사였다. 그들은 청운교와 백운교, 석가탑과 다보탑, 대석단 등 석조구조물을 복원하는 데 그쳤고, 대웅전 영역과 비전 영역 등 경내를 구획 짓는 회랑, 관음전, 무설전 등 목조물 복원은 손을 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강탈과 도굴의 아픔도 겪었다. 다보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사리와 사리장치를 비롯한 유물이 모두 사라졌다. 기단 돌계단 위에 있던 돌사자도 넷 중 하나만 남았다.

수리복원이 끝난 이후 불국사 방문객은 날로 증가했다. 국내는 물론 일본 황족과 고관대작의 행렬도 줄을 이었다. 일본관광객은 시모노세끼에서 배를 타고 부산, 대구를 거쳐 경주에 왔다. 여기에 1921년 불국사~울산 간 협궤선 개통, 1936년 광궤선 개통으로 일본과 부산·경남 지역 관광객이 더욱 편리하게 경주를 찾을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시내 관광 후 열차를 타고 불국사역에 내린 뒤 불국사를 관람하고 그 인근에 들어선 숙박시설에서 묵었다.

그리곤 꼭두새벽 석굴암에 올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엔 수학여행단 위주의 국내 관광객 발길이 이어졌다. 1970년대부터 경주는 신혼여행지로 부상했고 불국사와 석굴암은 핵심 방문지가 됐다.

1964년 석굴암 중수가 끝난 2년 뒤 석가탑 도굴이 발생하면서 불국사가 안팎의 관심을 모았고, 정부는 1969년 불국사복원위원회를 구성해 중건에 나섰다.

공사는 1973년에서야 마무리되는데, 그때는 총독부 공사의 남겨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전체 회랑을 복원하고, 관음전이나 무설전, 비로전 등 당우 재건이 핵심이었다. 대석단 전면으로 넓은 마당을 확보하고 주변 조경에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국사의 모습은 그때 결정된 것이다.

불국사는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로 장엄한 불국정토의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1997년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도 얻었다. 그러나 그 영광 이면엔 외세의 침탈과 독립이라는 우리 역사의 수난과 파란이 숨어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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