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연, 최부자의 무거운 몸가짐 - 뜻을 얻었을 때 담담하라!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2월 29일
공유 / URL복사
↑↑ 경주최부자댁 안채 모습.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에 들어가면 창고 앞에 육훈(六訓)과 함께 육연(六然)을 적은 안내판이 있어서 최부자댁 오랜 가훈을 알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최부자댁’ 하면 으레 ‘육훈’이 유명하고 ‘육연’은 최부자댁을 어느 정도 공부해 본 사람이나 아는 지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두 가르침은 최부자댁을 특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긴밀하게 얽혀 있다.

육훈이 집안 후손들을 경계하는 외형적 가훈이라면 육훈은 자손들 개개인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내면적 가르침, 마음을 닦는 자세이다. 육연을 한 번 더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
혼자 있을 때는 초연하라

[대인애연(對人靄然)]
사람을 대할 때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고 고요하라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했을 때 태연하라.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최염 선생님께 육연이 언제 어떻게 최부자댁 가르침으로 안착했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최염 선생님 역시도 그 유례를 알지 못해 선생님의 친한 친구분이신 박병호 교수님과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양명학자 최선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육연, 최염 선생님이 몸소 보여주신 최부자댁의 깊이 있는 가르침

박병호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법대에서 교수를 지낸 최고의 법학자이지만 법학에 못지않게 한학(漢學)과 서예에도 통달하여 ‘고문서 연구회’ 초대회장을 맡는 등 역사와 고사(古事)에 밝은 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박교수님은 대학 입학 시기에 자신은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법관이나 행정관리가 되기를 바라신 부친의 뜻을 이기지 못해 법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일단 법대에 입학한 뒤에는 고시 공부는 밀쳐둔 채 전공을 법제사(法制史)로 택해 이 방면의 대가가 되었고 그런 연유로 역사학과 고문서에도 두루 통달하게 되셨다.

여하간 박병호 교수님은 최염 선생님 부탁을 받고 육연과 비슷한 교훈사례가 있는지 조사를 시작했고 마침내 답을 찾았다. 교수님에 따르면 명나라 때 양명학자 중 한 사람인 최선(崔銑 1478~1541)이라는 학자가 옥중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최부자댁 육연과 비슷한 출처를 찾아내셨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인애연을 처인애연(處人靄然)으로, 유사감연을 이보다 더 뜻이 적극적인 뜻을 가진 유사참연(有事斬然)으로 쓴 것이었다. 최선은 생몰연대로만 보면 최부자댁 시조격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 이전의 학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 양명학이 전래된 것이 대체로 1521년 경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고 여겨져 이황 등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되었고 그보다 후대인 유성룡 등의 학자들도 양명학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명학을 인정한 대표적 인물이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를 이끌었던 최명길이지만 본격적으로 양명학의 체계를 세운 학자는 숙종대에 활약하던 정제두(鄭齊斗, 1649년∼1736년)라는 학자다. 이분은 초시만 본 후 당시 주자학의 폐해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나 벼슬을 단념한 채 양명학에 전념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정제두의 생애는 최부자댁 최국선(1631~1682) 공과 겹치고 최의기(1653~1722) 공, 최승렬(1690~1757) 공 등 3대와 걸친다. 양명학은 초기 실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이익(1681~763), 박제가(1750~1805) 등의 학자들이 모두 양명학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부자댁 이야기에서 양명학을 굳이 꺼낸 것은 최부자댁 육연을 만든 시기와 연결고리를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다. 양명학이 전통 성리학자들을 일깨워 진일보한 실사구시학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최국선 공이 한창 사옹원에서 활약하던 시기와 겹친다. 실제로 최국선 공은 실사구시의 영향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이앙법을 사용하여 부를 일으켰다. 본격적으로 만석꾼이 되어 후세들에게 가문의 법도를 세웠던 최의기 공 역시 몇 번 과거에 떨어지고는 일찌감치 부를 늘이는 일에 전념하였으니 이분 역시 육연을 알았을 법하다. 결국 최부자댁 오랜 가훈인 육연은 이 두 분이 활동하던 무렵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나의 경우 최부자댁 가훈을 몸소 지키고 실천하신 최염 선생님을 모시면서 육연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지키기 어려운 가르침이었어요. 그러나 그중에서 유사감연은 한창 사업을 하던 시절 내가 신봉하던 말이었고 대인애연은 나의 오랜 삶과 결부되었고 실의태연(失意泰然)은 자칫 격앙되어 쓰러질 수 있었던 나를 지켜주었던 가르침이기도 했지!”

최염 선생님은 최부자 후손으로 할아버지이신 문파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대구대학이 영남대학으로 합병되는 등 어려운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사업에 뛰어들어 동분서주하던 3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 무렵에는 유사감연을 실천했노라 대답하셨다. 남들이 한가지 만 해도 어려운 일을 30대 초반 나이에 무슨 일에서든 과감하게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실의태연의 경우에 대해 뼈저린 실례들을 들려 주셨다. 최염 선생님은 최부자댁 종손이자 문파 선생님을 지척에서 모신 손자로 문파 선생님께서 혼신을 다 해 일으키신 대구대학을 교육일념으로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무일푼에 넘긴 사례, 그 대학을 뜻밖에도 자식의 비리를 덮기 위해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헌납한 순간의 모든 사실들, 그 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선생님 자신이 중앙정보부 공안원들에게 납치되어 한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당하고 반죽음이 되어 풀려났을 때의 절통한 기억을 가지고 계신다. 다시 말해 숭고한 할아버지의 뜻이 재벌과 권력에 의해 짓이겨진 역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보고 느끼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은 IMF 당시에 차관을 잘 못 썼다가 수백억에 이르는 재산을 탕진하며 나락으로 떨어진 아픈 경험도 가지고 계신다.

“아마 실의태연에 대한 오랜 훈육이 없었다면 내가 그 힘든 시련을 거치면서 온전히 내 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을지 모르네. 자칫했으면 울화증으로 벌써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로서는 특히 선생님의 대인애연의 가르침을 직접 경험해온 사람이다. 최염 선생님은 대학시절부터 비서 격으로 문파선생님을 모시면서 당시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유명한 인물이나 고관대작들을 두루 만나야 했다.

“그럴 때마다 혹여라도 할아버지께 누가 미칠까 혹은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릴까 늘 처신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온화해질 수밖에 없었지!”

이 말씀은 깊이 공감되었다.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하랴 취재하랴 4년 가깝게 주변의 많은 인물들을 함께 뵐 기회가 있었는데 나이와 지위를 떠나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매우 겸손하고 상대가 편안하도록 배려하셨다. 심지어 나에게조차 오랜 기간 뵈었는데도 지금까지도 함부로 하대하시지 않고 늘 공대해주신다.



갑질 기업, 섣부른 재벌 2세, 고위 공직자들의 아첨과 권세에 최부자 육연 정신이 전해질 수 있다면?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섣부른 재벌 2세들 또는 운 좋게 성공하여 부자가 된 기업체 회장이란 사람들이 협력업체나 아랫사람들에 대한 망발·망언을 일삼는 갑질 행태를 보면 집안 교육, 사회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내 경우 대필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출세한 여러 정치인과 경제인들을 만났는데 출세를 위해 윗사람들에게는 과한 충성을 보이고 아랫사람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이 권세를 휘두르는 양면적인 행태들을 자주 보았다. 이런 행태는 리더십에 대한 교육이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다. 최부자댁이 대를 이어가며 후세에 가르친 이런 가치 있는 정신들이 기업들이나 고위공직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교육관이나 기업관, 공직관이 생기지 않을까?

외람되지만 최부자댁에 대한 책을 쓰면서 나 역시 육연을 따르고자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은 단지 노력일 뿐 쉽게 따르기 힘든 어려운 가르침임을 실감했다. 다행히 글 쓰는 작업은 혼자 있을 때 초연할 수 있는 직업이고 천성이 모질지 않고 역시 직업상 남의 이야기 듣는 것에 익숙하고 사람들을 늘 웃고 대하는 편이다. 살면서 네댓 가지 직업을 가졌는데 아마도 일을 즐기고 과감히 도전하는 습성이 있어서일 것이다. 이 셋은 태생적이거나 직업적으로 얻은 일이라 그나마 익숙하지만 나머지는 체득하기 힘들었다.

 우선 일이 없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무엇이라도 하려고 나대는 편이다. 뜻을 얻고 무언가 된다 싶으면 쉽게 자신감에 빠져 일을 망친 경우가 더러 있었다. 몇 번의 인생 쓴맛을 경험했을 때는 큰 상실감에 빠졌고 헤어나는 과정도 힘들었다. 어쩌면 최부자댁 책을 쓰면서부터 내 내면이 조금이나마 깊어졌고 나름대로 육연의 가르침에도 가까워진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런 마음을 얻은 자체만으로 육연은 나의 중요한 좌우명이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