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 경주 감은사 터

죽어서도 나라 걱정한 문무왕의 땅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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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층 쌍탑. 조명이 켜졌다. 세간의 불빛들을 모아 탑을 향해 쏘니 이내 탑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감은사 터에는 굳이 달이 뜨지 않아도 되겠다.

구절양장 추령을 넘으니 내리막길 끝에 널따란 대지가 펼쳐진다. 신비로운 세상이 나타날 것처럼 순하고 연한 땅이다. 메마른 하천엔 이름 없는 돌들이 호기롭게 누웠다. 저기 코앞이 바다인데 굴러갈 내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이것이 인생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그러기에 오늘만큼은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경주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길목에 불현듯 두 기의 탑이 있다. 감은사 터다. 야트막한 산과 들과 탑은, 별다른 구분 없이 서 있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또 지나칠 뻔했다. 여전한 곳을 왜 매번 가늠하지 못하는지.

새로울 것도 없는 저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처음 심연에 각인된 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정이었다. 파도가 뒤집히는 것보다 거칠게 다가오는 땅, 험하게 나를 끌어들이는 매혹의 순간엔 마치 저곳에 도깨비가 사는 듯했다. 시야를 빼앗고, 혼을 빼앗아 저들 마음대로 내 영혼을 놀아나게 했다.

↑↑ 금당 바닥돌. 큰 돌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돌 위에 장대석을 마루 깔 듯 걸쳤다.


신문왕, 아버지 은혜 감사한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신라의 호국사찰이었다. 태종무열왕의 장자로 신라 30대 임금인 문무왕(재위 661~681)이 삼국을 통일하고, 불문으로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감은사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절은 이듬해 신문왕에 의해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 문무왕이 지었던 사찰명은 ‘진국사(鎭圍寺)’였으나,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업적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바꿨다.

감은사는 죽은 왕의 능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능침사(陵寢寺) 같은 절이었다. 문무왕은 평소 승려 지의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라는 서원을 자주 남겼다. 용은 축생의 응보인데 어찌 왕이 짐승으로 태어나겠다고 하는지, 지의는 그저 민망했다. 문무왕이 말했다.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가 오래되었다. 축생으로라도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시신은 불태워진 뒤 동해 대왕암(大王巖)에 뿌려졌다고 한다.

금당은 좀 유별나게 지어졌다. 바닥은 큰 돌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돌 위에 장대석을 마루 깔 듯 걸쳤다. 사용된 주춧돌을 보면 유별스러운 웅장함이 보인다. 금당 터 앞의 석재엔 태극무늬를 새겼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지만 쓸모를 알 수 없다. 위엄 있고 엄숙한 절제가 곳곳에 스몄다.

동해와 감은사 사이엔 특별한 길이 있다. 바다와 절을 잇는 용혈이다. 동해에서 대종천을 타고, 절 아래 용담을 지나 금당 아래까지, 바람이 들고나는 허공의 길이다. 보이지 않는 길은 그렇게 현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았다. 금당 아래 공간으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한 구조라고 해설사가 말했다. 신문왕이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만든 특별한 구조라는 그럴싸한 설명이 흥미롭다.

신라엔 재밌는 설화가 전해진다. 앞바다에 작은 산이 떠다니며 유유자적했다. 산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기이하게 여긴 신하들이 왕에게 전했다. 신문왕이 직접 산에 들어가니 용이 된 문무왕이 나타났다. 동해의 신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신라에 보내는 것이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했다. 대나무를 베니 산은 거북이가 되어 사라졌고,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적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바람과 물결이 잦아들었다. 이 피리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해설사가 말했다.

해설사의 말에 빠져들 무렵, 바람이 불었다. 절터 뒤편에서 대나무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만파식적이라도 되고 싶은 요량인지, ‘떵, 떵, 땅’ 비슷하나 서로 다른 소리로 요란하게 부대꼈다.

왕실의 사찰이라고는 하나 금당과 강당, 회랑 터만 존재하는 걸 보면 감은사는 작은 암자 수준으로 보인다. 서쪽 귀퉁이에 작은 승방 터만 있을 뿐, 스님들이 머물렀을 법한 마땅한 공간이 없다. 왕실의 귀족들이 드나들었던 사찰답게 눈과 비를 피해 드나드는 회랑은 잘도 갖췄겠지만, 사찰을 지키고 법문을 행하는 스님들을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옛날은 이미 멀어졌고 이것도 남겨진 역사인 것을.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보니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감은사 터 곳곳에 민가가 존재했다. 어쩌면 절이 지어지기 전에도 이곳은 사람의 터전이요, 절이 무너진 후에도 천년이 지나도록 사람이 빗대고 빗대어 온 삶의 터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깊은 산중 이름 없는 절터를 찾아가면, 그곳엔 다시 땅의 주인들이 들어와 무성하곤 했다. 감은사는 분명 사람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사적지로 지정되어 사람이 살 수 없지만, 바다에 빌붙어 먹고사는 것을 해결했을 사람은, 본능적으로 볕이 고르게 드는 평온한 터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감은사 터 역시 사람과 역사가 섞이며 더불어 왁자했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절터를 떠돌았다. 사람의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도, 마을 어귀 경작지에도. 산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절터에 비하면 감은사 터는 법등은 끊어졌어도 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간 감은사 터가 불편했다. 와글대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불편했고, 빈틈없이 연결된 역사의 이야기와 작위적으로 꾸민 절터의 곳곳이 흥미로우면서도 숨이 막혔다. 빈 공간에서 마음대로 풍경을 떠 올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함부로 상상하고픈 습성이 감은사 터에서는 꽉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으니 막히고, 형식이 있으니 구속되고, 경계가 뚜렷하니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 감은사터 느티나무. 쌍탑 뒤에서 하나의 배경이 되어 그간 무수히 많은 사진을 장식했을 나무다. 때로는 고요히 쉬고 싶었을 테고, 때로는 홀로 고독하고 싶었을 게다, 저 나무.


야윈 느티나무, 폐사지 쓸쓸함 더해

이곳엔 한 해 한 해 야위어가는 느티나무가 있다. 듬직하고 늠름한 3층 쌍탑 뒤에서, 하나의 배경이 되어 그간 무수히 많은 사진을 장식했을 나무다. 느티나무는 헐벗었다. 망한 절을 두고 떠나던 스님들처럼 나무도 곧 떠날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승려들은 저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두고 애석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언제고 다시 절이 일어서기를 염원하며 다시 돌아오마 기약했을 것이다. 세상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을 승려들은 다들 어디서 해탈하셨을까.

여기서 발아해 한평생 절터를 지키며 늙어가는 저 느티나무는 감은사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다 열반에 든 노승의 환생인 것만 같다.

지난 여름, 탑이 아니라 나무를 보러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웅장하게 선 석탑을 더 돋보이게 하는 건 배경처럼 서 있는 느티나무라는 생각을 했다. 깊은 산중에 마음껏 뿌리 뻗고, 마음껏 그늘을 키우는 나무로 발아했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더 육중하고 푸르렀을까.

지난 여름엔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 학생들이 문화탐방을 왔다 갔고, 모 동호회에서 다녀갔다. 때로는 가족들이, 때로는 관계를 헤아릴 수 없는 모호한 무리가 다녀갔다. 나는 그들을 피해 풀섶에 앉아있거나 누워 있다가 관리인으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주의를 받았다.

절터 아래엔 매일 소박한 난전이 섰다. 마을 어르신들은 내가 건네는 눈빛에 반가워하며 가져나온 곡물보다 더 많은 감포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역사책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내 귀를 건드렸다.

“저 탑 안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으로 된 뭣(사리장엄구)이 나왔다 카니더. 우리는 한 번도 보도 못했니더. 우리 같이 나(나이) 많은 늙은이는 봐도 뭔동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봤으만 좋지. 암, 좋고 말고지”

절집은 사라지고 풀밭이 되었고, 바다는 물러나 뭍이 되었다. 이른 봄 감은사 터 너머로 가뭄 든 대종천 물줄기가 흐릿하게 흐른다. 곧 바다에 당도할 물줄기다. 대종천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운 몽골군이 황룡사 대종을 동해로 옮기려다가 빠뜨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떠밀려간 종은 비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바다가 뒤집히는 날엔 ‘웅, 웅’ 하고 운다고 했다. 대종이 우는 소리를 저 나무와 석탑은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누가 소리 없이 찾아와 겨드랑이를 간질이면 대종의 매무새나 그 울음소리가 어떠했는지 조곤조곤 말해줄 것만 같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동하면 나는 또 여기, 감은사 터를 찾아와 종일 앉아 막연한 역사를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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