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을 기억하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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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경주 황남동 대릉원 담장 서쪽에 경주김씨 13대 미추왕, 30대 문무왕, 56대 경순왕을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자리한다. 숭혜전 명칭은 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변하였고,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경주김씨 문중과 고을의 선비들이 월성에 묘우(廟宇)를 세워 영정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소실되었고,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장계로 청하여 인조 5년(1627년)에 묘우를 동천촌(東泉村)으로 새로 옮겨 지어 참봉과 노비, 전답을 두었으며, ‘동천묘’라 하였다. 경종 3년(1723)에 경상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의 청원으로 ‘경순왕전(敬順王殿)’이라 선액(宣額) 받았다.

 정조 16년(1792)에 전(殿) 뒤에 사태가 발생하고 정조 18년(1794)에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경순전 뒤에 모래 언덕이 있어 염려된다며 이건을 호소하자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봉황대(鳳凰臺)로 옮겼는데, 바로 미추왕릉 아래로 계림과는 100보 거리였다. ‘황남전(皇南殿)’이라 하였다. 이때 장수(長水)의 찰방 이명기(李命基)가 영천 은해사에서 동천묘로 이봉했던 경순왕 영정을 개모(改摸)하여 봉안하였고, 고종 24년(1887)에 김만제(金萬濟)의 소청으로 미추왕의 위패를 모시고, 그 이듬해에 판부사 김홍집(金弘集)의 주청으로 문무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고종이 경주부윤 김철희(金喆熙.재임1888.2~1888.9)로 하여금 사당을 증축하게 한 후 ‘숭혜전(崇惠殿)’이라 사액하였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으로 927년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 침략하여 55대 경애왕 박위응(朴魏膺)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인 김부(金傅)를 임금의 자리에 올렸으니 그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8년 재위 기간에 935년 12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정승(正承:政丞)에 임명되었다. 태조가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고,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되었다. 신라 망국 이후 978년 4월에 사망하였고, 능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 8리 언덕에 있다.

부윤을 지낸 이계 홍양호는 경순왕의 묘우를 개건(改建)하고 영정을 본떠 모사한 뒤에 봉안하는 제문(敬順王廟宇 影幀移摹後 奉安祭文)을,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1739~1822)은 황남전비각기, 강릉 김계락(金啓洛,1753~1815)은 1814년에 신라경순왕전비명(新羅敬順王殿碑銘) 등을 지었다. 1792년(정조16)에 헌덕왕릉(憲德王陵)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경순왕전(敬順王殿)이 있는데, 영정(影幀) 1본(本)을 지난 무술년(1778)에 영천의 은해사(銀海寺)에서 옮겨 와 봉안하였으니 당시 경순왕의 영정이 영천에서 다시 경주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경순왕의 영정은 1677년 원주(原州) 용화산(龍華山) 고자암(高自庵)에서 제작된 것과 1749년 영천 은해사 상용암, 1794년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다시 그린 것, 1904년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등 어진(御眞)이 존재한다.

서 언왕(徐偃王)은 주 목왕(周穆王) 때 서국(徐國)을 다스렸는데, 강회(江淮)의 제후 36국이 그를 좇자 주 목왕이 초(楚)나라를 시켜 정벌시키자 언왕은 백성을 사랑한 나머지 싸우지 않고 초에 항복하였다. 오월국(吳越國)은 무숙왕(武肅王) 전류(錢鏐)부터 충의왕(忠懿王) 전숙(錢俶)까지 3대의 네 왕이 혼란한 시대에 나라를 잘 보전했다가, 송(宋)나라가 일어나자 태종(太宗)에게 순순히 나라를 바쳐 백성들이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환락에 빠져 견훤의 급습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당하자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신라를 버리고 백성을 구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역사가들은 서 언왕,오월 충의왕,신라 경순왕 등을 비록 나라는 망하였지만,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아 대대로 추앙받는 시대의 마지막 왕으로 칭송하였다.

치암(癡庵) 남경희(南敬熙,1748~1812)는 1798년에 경순왕전 이건기(敬順王殿移建記)를 지어 그 내력을 소상히 남겼다.


경순왕전 이건기 - 치암 남경희

예로부터 조국을 떠난 군주 가운데 백성에게 덕이 있어 백대에 복을 받은 자가 셋 있는데 서 언왕,오월 충의왕,신라 경순왕뿐이다. 하지만 간혹 후손의 위패 봉안에 불과하고, 혹은 당시 왕의 장공(奬功)에 불과하였는데, 유독 경순왕은 승리국의 우빈(虞賓)으로 조정의 은나라 예에 따라 배향되었고, 숭상이 지극하고 더이상 여한(餘恨)이 없었으니 이는 성대한 덕에 사람들이 감동한 것이다.

왕묘(王廟)가 예전에 월성에 있었는데 초인(楚人)이 모옥(茅屋)에서 소왕(昭王)을 제사지낸 일처럼 그 유래가 대체로 오래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불타버렸고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방백 김시양(金時讓)이 부윤 윤의립(尹義立)과 이건하여 묘(廟)가 전(殿)이 되었다. … 금학산 아래에 있었는데 산세가 매우 급박하였고, 임자년에 홍수가 나서 사록(沙麓)의 재앙이 거의 전(殿)에 미쳐서 보는 자가 위태롭게 여겼다. … 갑인년에 전 참봉 김건항이 조정에 아뢰어 이건을 청하였고, 명으로 거행하여 장맛비에 범함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방백 조진택(趙鎭宅)이 지세를 보고 보고하여 부윤 송전(宋銓)이 기약을 받들고 걱정하였다.

임금이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에게 영정을 개모(改模)하도록 명하였고, 영정은 왕께서 일찍이 영천의 은해사 상용암을 원당(願堂)으로 삼고 유장(留藏)되었던 것인데 암자가 폐해지자 은해사 불당 위 감실에 감추어 두었었다. … 김씨들이 부탁하여 후일에까지 전하고 싶다고 하여 이 같은 전말을 기록한다. 전은 죽릉을 등지고 문수에 임하였는데 기세가 매우 높고 확 트였다. 숲이 그 밖을 둘러 비바람을 막아주고, 맑고 깊어서 좋았으며, 김성걸(金成杰)이 심은 것이라 하였다. 무오년(1798) 동지 전날에 영양남씨 남경희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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