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궁성이 있었던 월성(2)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4년 05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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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의 성벽은 서로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 올린 후 자연석을 무질서하게 깔았다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누각과 문지를 더듬다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동문지를 통과하여 월성으로 올라갔다. 월성 안으로 들어서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박물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매일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박물관의 바닥을 닦았다. 청년은 바닥을 닦으며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이 물었다.

“아니,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굳이 바닥 청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자 청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곳은 그냥 바닥이 아니에요. 박물관이잖아요?”

그로부터 멀지 않아 그는 이 박물관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몇 년 후 그는 권위 있는 고고학자가 되었고, 훗날 미국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장까지 맡았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탐험가로 알려진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Roy Chapman Andrews)박사이다. 이후 박사의 일대기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곳 월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주 이곳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괭이나 삽으로 흙을 파헤치지 않고 붓으로 살살 쓸어가면서 직업을 하는 연구자들을 볼 때가 있다. 이들이야말로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가 아닐까? 이들의 노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출발하기 전 월성발굴조사 해설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월성이랑’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해 두었다. 2014년부터 경주 월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데, 문화재연구소에 재직 중인 전공자가 상시적으로 발굴조사의 성과에 대해 현장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예약한 시간이 40여분 여유가 있어 먼저 성 위를 걸어보기로 했다. 최근 1주일 전에도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월성은 동서 길이 890m, 남북 길이 260m, 바깥둘레 2340m, 내부 면적은 20만7528㎡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841m이다.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월성 안에는 귀정문·북문·인화문·현덕문·무평문·준례문 등의 성문과 월상루·망덕루·명학루·고루 등의 누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와 같은 문과 누각은 모두 성벽을 통과하거나 전망이 탁 트인 성 위에 있었을 것이다. 헌강왕 때 왕이 신하들과 함께 내려다본 월상루도 지금 필자가 서 있는 이곳 어디쯤이었으리라.

월성의 성벽은 서로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 올린 후 자연석을 무질서하게 깔아서 만들었다. 성벽의 아래는 단단하게 땅을 다지기 위해 식물의 잎과 줄기 등을 얇게 층층이 깔아서 만드는 방법(敷葉공법)을 이용하였다. 또 조개껍질과 같은 석회를 층층이 깐 흔적도 확인되었는데, 이는 방수나 마감재로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쌓은 월성의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고 적으로부터 침입을 막아내면서 긴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다.

월성의 서쪽 성벽의 바닥층과 성벽 성토층의 경계면에서 50대 남녀 인골 2구와 소아 인골 1구가 확인되었다. 아마도 성벽 축조가 무사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땅의 신[地神]에게 제물로 바친 희생자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50대 성인 인골은 머리를 북동쪽으로 두고 있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본 채 바르게 누워있고 다른 한 사람은 옆 사람을 바라보도록 상체를 옆으로 튼 자세였다. 인골과 함께 출토된 토기가 대략 5세기 전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서쪽 성벽의 축조 시기를 그 즈음으로 볼 수 있고, 성벽을 보수한 흙 속에서 6세기 무렵의 유물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290년(유례이사금 7)에 홍수로 월성이 무너지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 월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475년(자비마립간 18)부터 487년(소지마립간 9)까지 명활성이 신라의 왕궁 역할을 잠시 한 뒤 다시 왕궁을 월성으로 옮겼을 때도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수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679년(문무왕 19)에 궁궐을 다시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중앙 건물지(C지구) 발굴조사에서 ‘의봉4년(儀鳳四年, 679년) 개토(皆土)’라는 명문기와를 수습하였다. 이때 월성을 수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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