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사랑채에는 어떤 손님들이 다녀갔을까?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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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 가훈 중 최부자댁의 넉넉한 인심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는 말을 즐겨 인용한다.

그 해석 방법도 다양하여 누구는 이 가훈이 과객 대접을 통해 전국의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고도 하고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 유림을 비롯한 명문가들과 우호를 증진시키는 방법이기도 하고 세상의 인심을 얻으려는 방책이었다는 평가도 한다. 대체로 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과객을 대접하는 것은 비단 최부자댁뿐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가나 부잣집에서 으레 해오던 오랜 관습이었다. 특히 양반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무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봉제사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고 접빈객은 과객 맞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굳이 양반이나 부자가 아니라도 과객에게 관대했던 것은 우리 조상들의 미풍양속이었다. 60세 이상의 시골 출신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 자기 집에 낯선 외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묵어가거나 밥을 얻어먹으러 오곤 하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럴 만큼 근대에 이르도록 과객들이 있었고 그들을 대접하는 문화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만 해도 내 어린 시절 수시로 과객이라고 할 만한 분들이 드나들었다. 친구 사귀기 좋아하시고 온갖 모임에서 간부로 활동하셨던 아버지께서 수시로 사람들을 집으로 이끌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스님도 있었고 친척도 있었고 친구분들도 있었는데 집에 오면 며칠씩 묵어가거나 아예 몇 달씩 얹혀 살다시피 하는 분들도 있었다. 어떤 때는 큰댁에 다니러 온 분들이 우리집에서 머물다 가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우리 집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좀 형편이 괜찮다 싶은 집에서는 보통으로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누대에 걸친 대단한 부자, 과객의 질적 수준이나 양적 숫자가 다른 집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많아

그런 시절에도 최부자댁의 과객대접이 남달라 보였던 것은 최부자댁이 누대에 걸쳐 대단한 부자로 지내다 보니 과객의 질적 수준이나 양적 수효가 다른 집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많아서 좀 더 주목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집 사랑채는 언제나 손님들이 드나들었어요. 그냥 사람들이 오가는 정도가 아니라 숫제 먹고 자고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아무나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를 들락거린 것은 아니었지요. 유심히 살펴보면 사랑채는 손님들 중에서도 좀 특별한 손님들이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에서 함께 묵으셨어요”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최부자댁 손님들은 상객·중객·하객으로 나누어졌다. 물론 최부자댁에서 이렇게 나누었다기보다는 대체적으로 이런 경향이었다는 뜻이다.

상객대접을 받는 사람은 문파 선생님이 머무르시는 큰 사랑에서 대놓고 함께 먹고 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중요한 분들은 작은 사랑채를 통째로 비워서 편하게 계시도록 조처해 드리기도 했다. 여기에는 주로 중앙이나 지방의 권세가들 혹은 그들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머물렀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고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매우 중요하게 존중받는 도시였다. 조선시대에도 ‘부(副)’를 둘 만큼 중요성을 꽤 인정해준 편이어서 경주부에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유력한 벼슬아치들이나 경주를 유람오는 고관대작들의 친인척이 끊이질 않았다. 호텔이나 여관 같은 현대적 숙박시설이 없던 시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경주부에 딸린 관가의 공식 영빈관인 ‘동경관’이나 최부자댁과 같은 지방 유지의 집밖에 없었다.

특히 최부자댁은 대대로 명성이 높아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경주에 오면 대체로 최부자댁 같은 큰 집이나 내로라하는 명문가에 머무르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들 중 우대를 해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큰 사랑에 모셔졌고 거기서 선대(先代)의 최부자 가주들이랑 침식을 같이 했다. 때문에 역대의 선비나 학자 정치인 중 경주를 잠깐이라도 다녀간 분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손님대접에 정성을 들이는 최부자댁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최부자댁 뿐 아니라 다른 지방의 토호나 부잣집에서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지만 이것을 가훈으로 정해 놓은 것이 최부자댁의 특별한 점이라 할 수 있다.


↑↑ 겸재 정선의 반구대 그림.


겸재, 추사, 면암, 해월, 신돌석 장군... 의친왕 이강 공, 위당, 육당, 의암, 인촌... 명사들이 모두 들렀다 간 경주의 명소

이렇게 최부자댁 다녀간 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실제로 그분들이 남긴 흔적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예가 겸재 정선(1676-1759)과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다. 이런 명사들이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렀다는 증거는 이분들이 남긴 유적과 화첩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겸재 정선은 최부자댁 땅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고 특히 정무공 할아버지 산소를 모신 울주군에 정선이 다녀간 유적이 있어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선사시대 암각화, 특히 고래 생태와 사냥방식이 그려져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집청정(集淸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은 영조 때 정무공의 후손인 사파 최진기 공이 경주 최씨 문중정자로 지은 곳인데 예로부터 풍광이 빼어나 시인묵객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명소였다. 겸재 역시 이곳에 머물며 반구대 암각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는 내연산을 각별히 사랑하여 내연산 폭포도도 그렸고 그 자신 내연산이 오히려 금강산에 비해 못하지 않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겸재가 이처럼 내연산과 반구대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말년에 화양현감을 지냈기 때문인데 화양은 지금의 구미다.

최염 선생은 할아버지 문파 선생 당대에도 많은 유명 인사들이 최부자댁을 다녀간 것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셨다. 그중 역사적인 인물만 꼽아도 헤아릴 수없이 많다. 구한말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일본에서 아사(餓死)순국한 면암 최익현(1833-1907) 선생,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 등도 최부자댁을 다녀가신 분들이다. 최익현 선생이나 최시형 선생은 모두 경주 최씨 어른들이다. 자연히 최부자댁과 밀접한 관련되었을 것이다. 최익현 선생과 최시형 선생은 문파 선생 유년기에 최부자댁에 머무르면서 문파선생의 어린 마음에 독립운동의 정신과 사람을 존중하는 큰 뜻을 심어주신 분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신돌석(1878-1908) 장군도 최부자댁 사랑채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신돌석 장군은 문파 선생과 열 살도 차이가 나지 않는 분이시지만 윗대인 최현식 공의 총애를 받았고 최부자댁과 관련된 초인적인 용력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 최부자댁에 숨어 산 신돌석 장군.


문파선생이 가주가 되신 이후로도 많은 권문세가와 저명인사들이 최부자댁을 드나들었다.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은 낙척된 비분강개를 달래기 위해 영남일대를 유람하던 중 최부자댁에 들러 문파 선생과 사귀면서 선생께 문파(汶坡)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기도 하고 직접 편액을 써 주기도 했는데 아깝게도 그 편액은 1970년, 사랑채 화재 때 함께 불타고 말았다. 지금 경주에 가면 사랑채에 문파 선생의 호를 적은 ‘汶坡’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최염 선생님의 오랜 벗인 박병호 전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쓴 글이다. 그 편액을 자세히 보면 원래는 이강 공이 써준 글이 불에 타 없어져서 자신이 다시 쓴 내막이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의 명사들도 최부자댁을 드나들었다. 선각자인 위당 정인보 선생과 육당 최남선 선생이 함께 최부자댁 사랑채에 머물면서 경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동경지’를 만들기도 했다. 위당 선생은 내 모교인 경주고등학교 교정에 모셔진 학교 창립자 수봉 이규인 선생 동상에 수봉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위당 선생은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신 선각이셨고 육당 선생 역시 이 동경지를 만들 당시는 독립정신에 투철하셨던 시기로 일본경찰들의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이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아무도 몰래 경주의 최부자댁에 숨어 살면서 문파선생과 유대를 이어갔던 것이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 역시 최부자댁을 다녀갔다. 손병희 선생은 문파 선생과 깊이 교유하신 분으로 나중에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을 문파 선생에게 인수하라고 권하셨던 분이기도 했다. 당시 문파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백산주식회사를 설립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 제의를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 고려대학교의 창시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아닌 문파 최준 선생의 이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문파 선생은 보성학원 인수를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권한 장본인이다. 실제로 고려대학교를 이어받은 인촌 역시 자주 최부자댁을 다녀갔다. 김성수 선생은 특히 최부자댁 정원에 놓여있는 석수조를 고려대학교에 기증해달라고 탐냈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 ‘최부자댁 가보’에서 상세히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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