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敵將)도 효행에 감동, ‘왜적으로부터 마을 지켜’

이상욱 기자 / 2024년 06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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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 안강읍 갑산리 소재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 전경.


① 안강읍 갑산리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

안강읍 갑산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적장이 효부(孝婦)의 효행에 감복해 왜적의 침탈로부터 면하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효부이씨 정려비(孝婦李氏 旌閭碑)에 새겨져 있는 효부 이야기다.

이 비각은 경주에서 안강읍으로 가는 2차선 국도를 따라 갑산리 농공단지를 지난 뒤 옛 철길 건널목에서 300여m 쯤에 한옥 기와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앞은 형산강 줄기다.
이 비각 내 비석에는 ‘孝婦李氏之閭(효부이씨지여)’ 여섯 글자가 음각돼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이씨는 안강읍 죽전마을에서 태어나 영천군 창수마을의 문중으로 출가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남편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는 앞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충절이 놀라운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선비로서 학문을 숭상하는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학문을 하지 못한데다 허약한 몸으로 인해 결혼한 지 1년도 못 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어머니마저 괴질로 몸져 누웠다. 청상과부인 이씨는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했지만 시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창수마을에서 살길이 막연하게 된 이씨는 여러 이웃들의 권유로 친정인 죽전마을로 돌아오게 됐다. 이후 이씨는 친정 집안 어른들로부터 어느 양반 가문의 후실로 재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창수마을에 홀로 지내는 앞을 볼 수 없는 시아버지가 주야로 걱정돼 감히 재가할 마음을 낼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한 이씨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죽전마을로 모시고 와 친정 집안이 마련해 준 오두막집에서 살게 됐다. 친정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 오로지 갈 곳 없는 시아버지를 정성으로 섬기며 살았다.

그러자 친정 집안에서는 시아버지를 영천으로 모셔다드리고 재가할 것을 재촉했지만, 이씨는 단호히 거절하고 시아버지 모시는 일에만 정성을 쏟았다. 항상 방을 따뜻하게 해 잠자리를 보살폈고, 식사 공양도 지성으로 받들었다. 인근 마을에서는 이씨의 효행에 칭송이 자자했다.


↑↑ 본지 145호 5면에 실렸던 기사.


적장 ‘효부마을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표식 남겨

하지만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침략하면서 “왜적은 성질이 아주 포악해 부녀자들을 농락하고 잔인한 짓은 예사로 한다더라”, “왜적은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말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집집마다 피난 준비로 부산했다. 이씨의 친정 집안도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씨도 시아버지께 피난갈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맹인의 몸으로 다리마저 성하지 못해 며느리에게 짐이 될까봐 이씨에게만 피난을 떠나라고 말했다.

“아가! 나는 이미 늙었으니 설령 왜적들이 온다 해도 어찌하겠느냐? 어서 사돈댁 식구들과 같이 너나 떠나거라”고 했다.

그러자 이 씨는 “아버님께서 떠나시지 않으시면 저도 아버님을 모시고 이대로 남겠어요”라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이씨는 앞을 못 보고 다리마저 성하지 않아 걷지도 못하는 시아버지를 두고 차마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친정 식구들의 강요를 뿌리치고 텅빈 마을에 시아버지와 외로이 남았다.

이씨는 집에서 왜적들에게 당하는 것보다 시아버지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갑산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저 멀리 왜적들이 오는 것을 보고 엉겹결에 유교(柳橋)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시아버지와 함께 숨었으나 들키고 말았다.

이 씨는 짐보따리 옆에 시아버지를 숨기고 치마로 덮어두고는 떳떳이 왜적들을 맞이했다. 왜적들이 치마를 들치고 시아버지를 발견하자 더욱 수상히 여겨 죽이려했다. 이때 이씨는 왜적들에게 “아버님을 죽이려거든 나를 죽여라”하며 대항했다.

↑↑ 효부이씨 정려비 내부 모습.


왜적들은 시아버지를 가짜 맹인이라고 우기며 칼로 내려치려 할 때 마침 다리 위에서 말을 타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왜적 장교가 “두 사람을 이리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10리나 떨어진 죽전마을까지 끌려갔다. 왜장은 외모가 귀골스럽게 생긴 시아버지를 첩자로 알고 혹독하게 문초했다. 그러자 이씨는 왜장에게 매달리며 손짓발짓으로 사실이 아님을 전하려 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적들은 시아버지를 막아서는 이씨를 사정없이 매질했지만, 이씨는 시아버지만 살려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끈덕진 부인의 호소에 감동된 왜장은 왜적 첩자와 통역을 통해 이씨와 시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갑산마을과 죽전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이씨의 덕행을 알게 된 왜적들은 그의 효행에 감복했다.

왜장은 이 씨에게 “훌륭하신 부인을 몰라뵙고 무례하게 행한 일을 용서하오”하면서 사과하고, 부하에게 명령해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왜장은 ‘효부의 마을에 함부로 들어가 동민을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서 마을 입구에 표식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왜인들은 갑산마을을 지나치면서도 동민들을 괴롭히거나 약탈 방화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갑산마을 사람들은 ‘이씨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온 마을이 왜적의 참화를 모면했다’며 이씨의 효성을 기리는 효부각을 세워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효부이씨 정려각 앞에는 효부이씨의 일화를 새긴 비석이 있다. 1991년 10월 세운 비석에는 건립 연대(조선 인조 조), 위치(경주군 안강읍 갑산리 715), 관리주체(창녕조씨 하양중립 죽원재 문중) 등이 새겨져있다.

또 ‘인조께서 정려해 건립했으나 그 후 퇴락해 1805년 중수하고, 1923년 철도 부설로 인해 현 위치로 이건했으며, 1960년 보수 후 1991년 10월 중건하다’라고 건립 연혁도 기록돼있다.

↑↑ 안강읍 대동리 소재 월성손씨정려비각.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다.


②안강읍 대동리 ‘월성손씨정려비’<月城孫氏旌閭碑>

안강읍 대동리 182번지에는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조정에 알려 세웠다고 전해지는 월성손씨정려비(月城孫氏旌閭碑)가 있다.

본지 146호(1992년 12월 7일자) 보도 당시에는 정려비가 쓰려져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지난 2일 찾은 이곳의 비는 제대로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비각 내외로 수풀이 우거져 있고, 안내판은 녹슬어 있는 등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출입문은 잠겨져 있어 내부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려비는 최근에 바로 세워진 듯 보였다.

↑↑ 비각 내부 모습.

이 비의 주인공은 월성손씨다. 집안에서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자란 손씨부인은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부덕을 닦아 현모양처로서 손색이 없는 인품을 갖췄다고 한다. 조선조 때 김씨와 지금의 약혼식으로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손씨가 결혼해 시댁에 들어가기도 전에 남편이 모진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눕자 시댁에 들어와 성심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다.

그러나 남편 김씨는 부인이 간호한 효험도 없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손씨 부인은 남편을 따르고자 결심했으나 시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마을 앞 연못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이 주민들에 의해 암행어사에게 알려졌고, 암행어사는 조정에 알렸다. 조정은 열부 경주손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하고, 비와 함께 비각을 세웠다.


↑↑ 본지 146호 5면에 실렸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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