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부자댁에서 대접받고 온 사람이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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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 곳간과 그 앞에 놓인 뒤주.

↑↑ 박근영 작가
지난주 최부자댁 과객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한 ‘누구나 퍼갈 수 있는 최부자댁 쌀 뒤주와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과메기’를 보고 어느 분이 이게 정말 일어났던 이야기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라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신 최염 선생님의 회고란 것은 분명히 밝혀둔다. 

나아가 최염 선생님이 오랜 기간 최부자댁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세간에 잘못 알려진 이야기들이나 과장된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히 그 사실여부를 따져가면서 진실을 말씀해 주셨던 만큼 이 쌀 뒤주와 과메기에 대해서 100% 사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장에서는 최염 선생님께서 직접 해주신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이 쌀 뒤주와 과메기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본다.


쌀 한 줌, 과메기 한 마리를 가지고 가면 어느 집에서나 밥도 해주고 재워주었다. 방이 많은 집은 소작도 많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 큰 대문 옆에는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의 쌀 뒤주 몇 개가 늘 서 있었어요. 높이가 어른들 허리춤에 닿고 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상자 같은 가구였지요. 그것은 빈 뒤주였는데 그것이 왜 거기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었지. 그래서 할아버지께 여쭈어보았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최부자댁 대문을 지나 들어서면 오른쪽에 행랑채가 있다. 그 행랑채를 돌아가면 언제나 쌀 뒤주 몇 개가 늘 지키는 사람 없이 서 있었고 그 뒤주 뒷벽에는 바가지 몇 개와 청어과메기 두름이 기다랗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뒤주를 지키지 않은 것은 그 속에 든 쌀을 아무나 퍼가라는 뜻이었다. 과메기는 밥만 먹을 수 없으니 반찬을 하라는 배려였다. 다만 이 뒤주는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뒤주는 뚜껑 대신 널판을 덮고 널판 가운데 어른이 두 손을 넣을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그 아래 한 자 반쯤, 꼭 어른들 팔이 닿을 수 있을 깊이쯤에 쌀이 채워져 있었다. 쌀을 퍼가되 욕심내지 않고 적당히 퍼가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이것은 과객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과객이란 엄격히 말하면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나다니는 사람들을 칭했다. 어디서 어디로 가다가 중간에 들리는 사람이 문자 그대로의 과객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을 밝히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고 주인과 동격으로 대할 자신이 있을 만큼의 신분이 있거나 행색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과객들 이외에도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먹을 것 없는 사람이 잠잘 곳은 있을까? 이들은 과객이라기보다는 유민이나 걸인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설혹 그렇지는 않더라도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들이라 부잣집 문턱을 넘는 자체로 공연히 기가 죽는 사람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잣집은 아무리 문을 열어놓아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거북함이나 어색함을 주는 법이다. 

함부로 들어가려고 하지도 못하겠지만 들어가서 누구를 붙잡고 밥 좀 달라 부탁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최부자댁에서 과객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막상 최부자댁에 오더라도 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기부터 죽었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집안사람들을 붙들고 밥 달라고 하는 것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문대로’ 조용히 행랑채를 돌아서 쌀 뒤주를 찾았고 조심스럽게 쌀을 퍼내고 과메기 두어 마리를 뽑아서 동네의 만만한 집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서 집안사람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이 뒤주의 쌀은 비록 뒤주에 일정 크기의 구멍을 따로 뚫는 것으로 기본적인 양을 한정해 두긴 했으나 누구에게나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뒤주였고 청어과메기 역시 마릿수에 상관없이 누구나 마음껏 가져갈 수 있었다. 그것을 들고 동네에 있는 어느 집에라도 가면 그 집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쌀로 밥을 짓고 그 과메기를 굽거나 찌개 혹은 국으로 요리를 한 다음 김치나 장 등 다른 반찬을 추가해 대접하고 잠도 재워주었다.

이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랜 기간 굳어진 약속이 아니면 쉬 행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최부자댁 대문이 다른 명가의 솟을대문보다 낮고 작다고 하여도 엄연히 영남 일대 최고의 명가요 부자로 알려진 집인데 이런 집에 들어가서 공짜로 쌀을 푸고 과메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사전에 그만큼 소문이 나 있지 않으면 아무리 배짱이 좋은 사람이라도 쉽게 들어가서 쌀과 과메기를 들고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일이 오랜 기간, 누대에 걸쳐 길든 일이 아니면 베푸는 사람이나 퍼가는 사람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쌀과 과메기를 가져가면 동네 사람들이 과객을 흉허물없이 맞아주는 것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지켜진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 중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최부자댁 권속들의 집이고 그 이외의 집들 역시 음으로 양으로 최부자댁과 관련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당연히 최부자댁 과객맞이에 익숙했을 것이고 그게 최부자댁과의 오랜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최부자댁 과객맞이 역시 최부자댁의 오랜 전통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권속이고 관련을 맺고 살아도 과객을 쉽게 맞아주는 것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최부자댁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와 관련한 일종의 다른 보상을 해주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최염 선생님의 대답은 매우 간명했다.

“과객이 찾아 들어가는 집들은 가지고 있는 방의 수에 따라 소작을 더 붙이거나 덜 붙이거나 했어요. 방이 많다는 것은 과객 맞이를 더 자주, 더 많이 할 수 있으니 더 많은 소작을 붙이는 것이 옳다고 여긴 것이지요. 대신에 방으로 인해 늘어나는 소작에 관해서는 소작료를 받지 않았는데 이것은 요즘 시대에 비추어 봐도 아주 획기적인 보상이라 할 수 있어요. 만약에 주는 것 없이 방을 내주고 과객을 대접하게 했다면 처음 한두 해는 억지로라도 따랐겠지만 그것을 누대에 걸쳐서 할 수는 없었겠지요”


↑↑ 최부자댁 곳간 앞에 재현된 뒤주.


최부자댁에 과객맞이 법도가 있다면 과객들에게도 그들만의 염치와 양심, 보이지 않는 약속이 있었다.

또 한 가지, 아무리 최부자댁이 좋은 마음을 냈다고 해도 과객들이 함부로 쌀을 퍼가거나 과메기를 무작정 가져가 버리면 좋은 일이 오래 가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 일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법도 너무나 간단했다.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부분 쌀 한 줌에 과메기 두 마리씩만 가져가곤 했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염치가 있었던 거라. 굶주린 백성들이 다 죽어가면서도 쉽사리 폭도가 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염치와 도리를 알았던 덕분일 겁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쌀 뒤주와 과메기를 열어 놓았다 해도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퍼갔다면 어떤 큰 부잣집이라 해도 그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없었겠지요”

최부자댁에 과객을 맞는 법칙이 있었다면 과객들이 최소한의 도리와 옛사람들 특유의 자존의식, 그들만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굶주려도 자신들의 한 끼 식량 정도만 퍼가는 염치와 양심을 지킬 수 있었기에 누대에 걸친 쌀뒤주와 청어과메기의 나눔이 가능했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어쨌거나 정식으로 묵어가는 과객들보다 쌀 퍼가고 과메기 떼 간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 것인데 나중에 보면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칠첩반상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다녔다는 겁니다. 우리집에 와서 과객질 한 것을 자기들 나름대로 부풀려서 이야기 하고 다닌 거지요. 기왕에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다면 당당하게 대접받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설혹 뒤주 쌀에 과메기로 밥 한 끼 겨우 먹은 사람들이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최부자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자랑하며 다녔다는 말이다. 덕분에 최부자댁 인심이 실제보다 더 과하게 포장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최염 선생님이 웃으셨다.

안타깝게도 쌀 뒤주와 과메기가 사라진 것은 문파 선생님이 백산무역을 통해 전재산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면서 파산한 이후로 짐작된다. 이때는 최염 선생님조차 태어나기 전의 일로,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으로만 들은 일이라 기억하셨다. 전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희사하셨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재산은 다시 대구대학 설립에 전부 희사하셨던 문파 선생님이셨으니 어려운 백성을 돕기 위해 내놓았던 뒤주와 과메기를 없애면서 느꼈을 애통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된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최부자댁 육훈 중 하나인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 떠오른다. 쌀뒤주와 과메기 두름의 이야기는 과객맞이라고 하기보다 빈민구휼에 더 가까운 사례일 것이다. 최부자댁 조상들이 행한 이 아름다운 실천이 지금에 이르러 더 빛나는 것은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부자들이 자신들만 잘 살 줄 알았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탓이 아닐까?

언젠가부터 최부자댁에 가면 800석 들어가는 곳간 앞에 빈 쌀뒤주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염 선생님이 오래전 최부자댁에 놓여 있던 쌀 뒤주를 기억하고 다시 재현해 놓은 쌀 뒤주일 것이다. 지금 뒤주는 비어있어서 더 이상 과객을 받지 않고 과메기 두름도 볼 수 없다지만 뒤주라도 보면서 백성들을 위하는 그 큰마음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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