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름 없는 농경지 관리와 대접받은 가복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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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전경.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은 날마다 100여명의 과객을 치러야 했으니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했다. 또 넓은 경작지를 관리해야 했으니 그에 따른 인원도 필요했다.

그렇다면 최부자댁에는 어떤 관리인들이 있었고 몇 명쯤의 가복(家僕)들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스무 명 안팎이다. 경작기 관리는 주로 친척들이 맡아서 보았고 그들이 가복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가복이라는 말은 최부자댁에서 남녀 일꾼들을 통칭해서 쓴 말인데 가복 중에서도 여자 가복의 숫자가 좀 더 많았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과객을 치러내야 하는 부엌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최부자댁에는 전통적으로 마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마름은 지주를 대신해 일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리인이었다. 대지주는 보통 권력도 많고 하는 일도 많아서 일일이 농사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수완 좋은 마름을 두고 농경지 관리를 시키면 알아서 힘들고 험한 일을 다해주었다. 일일이 골치 썩히지 않고 수확 때마다 적당히 마름에게 떼주고 수익만 챙기면 되는 셈이니 부농이라면 당연히 마름을 두고 자신은 유유자적할 만했다



마름이 잘 하면 공을 마름이 가져가지만 마름이 혹독하면 그 해가 주인에게 돌아와

최염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최부자댁에서 마름을 두지 않는 것은 마름의 병폐를 안 선대 최부자들의 선택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마름들이 중간에 소작농들의 이익을 착취하고 소출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잘 아셨지요. 특히 마름이 잘하면 공(功)은 마름이 가져가지만 마름이 혹독하면 그 해가 주인집에 온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대신 그 많은 전답을 관리하기 위해서 관리인을 따로 두어야 했다. 이것은 조선시대 농경관리에서는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이런 관리법은 마름보다 큰 이점이 있다. 관리인들은 이미 자신의 수입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따로 욕심부릴 이유가 적었고 소작인들은 관리인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이나 형편을 정확하게 보고할 수 있는 창구로 활용할 수 있다. 지주 입장에서도 관리자들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소출을 알 수 있고 경작지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를 들을 수도 있으니 마름을 두는 것보다 장점이 많았을 것이다. 물론 관리인이 소작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려 들면 못 할 이유도 없지만 최부자댁과 관리인 사이의 오랜 신뢰를 통해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을 것이다. 최염 선생님 역시 관리인들과 함께 현장을 돌아본 경험이 자주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서나 혹은 집안 관리인들과 함께 ‘수’를 보러 다니곤 했는데 이것은 나뿐 아니라 윗대 조상님들이 어릴 때부터 누구나 경험했던 일이었어요. 수를 본다는 것은 추수할 수확량을 본다는 것이었는데 주로 가을걷이하기 전에 다녔어요. 물론 어린 아이들이 그 역할을 할 리 없었지만 거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있었어요. 이 수를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리감독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를 볼 때 관리인들이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원성을 쌓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풍작을 점검하는 것보다 흉작을 제대로 점검하는 데 더 역점을 두었다. 흉년이 지거나 개별적인 문제로 인해 흉작이 예상될 경우 관리인들은 그에 합당한 이유를 적시하고 최부자댁은 소출이 줄어들면 소작료를 내려주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인심을 쌓기는 어렵지만 인심을 잃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므로 풍년에 소작료를 더 챙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도 흉년에 가뜩이나 힘든 소작농에게 똑같은 소작료를 물리면 그것은 한 마디로 굶어 죽으란 말과 같을 겁니다. 몇 대를 이어오며 우리 집에 기여해 온 소작농이 대부분인데 그들이 어떤 여건에 의해 어려운 상황이 되면 그로 인해 우리 집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여긴 것이지요. 이것 역시 우리 집안이 남다른 점이었고 할아버지들의 특별한 애민 정신이었을 겁니다”

나는 당시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굉장한 애민정신이기도 했지만 매우 현대적인 매우 절묘한 인사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 편, 아무래도 최부자댁 가주들보다 소작인들과 더 자주 맞닥뜨리는 것이 관리인들이다 보니 이 관리인들이 소작농들에게 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다녔고, 내놓고 철마다 온갖 선물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물론 소작인들 이전에 최부자댁에도 해마다 온갖 특산물들을 보내왔는데 최염 선생님은 우스갯소리라며 ‘좋은 물건들은 관리인들에게 보냈고 좀 못한 물건들은 우리 집으로 보냈다’며 웃으셨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만큼 관리인들에게 일의 권한을 주었고 선대로부터 관리인들을 돈독히 믿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방 후 토지개혁을 할 때 최부자댁 농지 중 상당수가 무상으로 분배되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자들이 바로 이들 관리인들이었다고 한다.

한편 갑오개혁(1894년) 이후 노비제도가 폐지된 이후 최부자댁은 어떤 제도를 통해 가산을 관리했을지도 궁금한 대목이었다.

“내가 어릴 때는 남자들의 경우는 ‘머슴’이 집안일을 다 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요즘 직장에서 단계별로 직책이 있듯, 그때는 머슴들에게도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나름대로 등급이 매겨져 있었어요”

머슴은 상머슴, 중머슴, 하머슴으로 나누었다. 기본적으로 머슴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그 다음은 일하는 정도에 따라 상중하로 기준을 정한 후 그 기준에 따라 세경(細徑)을 더 주기도 하고 덜 주기도 했다. 그중에서 상머슴쯤 되는 사람은 힘이 세고 일도 요령껏 잘하고 책임감도 큰 사람이다. 보통 상머슴은 일 년에 나락 10섬의 세경을 주었다. 나락 10섬이면 조선시대 종9품 ‘참봉’의 급료와 맞먹는데 최부자댁 머슴들은 대체로 모두 상머슴의 대우를 받았다. 이에 대한 최염 선생님 회고가 재미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머슴들끼리도 서로 할아버지 눈에 띄기 위해 은근히 경쟁했어요. 한번은 우리 집에서 소를 두 마리 먹였는데 소여물을 재울 때 머리가 좀 돌아가는 머슴 한 명이 제가 맡은 소를 살찌우기 위해 가끔 곳간에서 콩을 훔쳐 소에게 죽을 쑤어 먹이곤 했어요. 그러다가 발각되었는데 그로 인한 불이익이나 벌을 받지 않았어요. 경쟁이 지나치긴 했지만 우리 집을 해하거나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어서였어요. 의도가 좋은 일이고 그 정도의 재량권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여자 가복들 역시 일하는 요령에 따라서 등급이 있었다. 특히 바느질이 능한 가복과 음식 솜씨가 좋은 가복, 혹은 특별한 재주를 가진 가복들이 대우를 잘 받았다. 최부자댁 남자 가복이나 관리인들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출퇴근을 주로 했던 반면 여자 가복들은 반쯤은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지냈고 반쯤은 밖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일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과객들을 효과적으로 대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집 밖에서 아무리 인심을 쌓아도 집안에서 어긋나면 모래 위에 쌓은 탑이나 마찬가지!

그러면서 최염 선생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 하나를 더 들려주셨다. 사실은 이게 이번 장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일 것이다. “윗대부터 내려오는 가법 중 하나가 우리 집안에서는 가복이나 머슴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절대 없었어요. 이유는 그들 역시 식구라는 분명한 개념이 있어서였지. 그들을 식구로 대한 이유도 물론 있었어요”

인심이란 것이 매우 묘해서 집 밖에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인심을 쌓아도 집안에서 인심이 어긋나버리면 그것은 모래 위에 쌓은 탑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과객맞이를 잘하고 아무리 굶주린 백성을 잘 돌보아도 내 집 식솔들에게 소홀하거나 내 집 가복들에게 가혹하게 굴면 그들이 나가서 집안 흉을 보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하루아침에 밖에서 쌓은 인심이 물거품이 되고 결국 겉 다르고 속 다른 집으로 전락해버린다. 심지어 그들이 밖에 나가 거꾸로 내 집을 들이치는 화적이 되기도 한다.

내부적으로 인심을 쌓는데 더 역점을 둔다는 매우 현대적인 경영 개념에서도 매우 획기적으로 풀이된다. 많은 기업가들이 겉으로는 자선을 쌓으며 이미지를 좋게 하면서도 정작 기업 내부에서는 임직원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근무환경을 열악하게 해놓고 작은 임금과 부당한 대우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그 기업에 속한 임직원들이 밖에서 자기가 속한 기업에 대해 좋게 이야기할 수 없다. 종종 기업의 비리나 부당거래 같은 일들이 언론에 떠벌려지는데 그게 대부분 내부고발에서 비롯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재벌가 혹은 기업 오너,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아랫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처신으로 기업이 불매운동에 시달리고 정치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집안, 내부를 다스리는 근본을 놓쳤기 때문이다.

한편 최부자댁은 급료를 지급하는 가복들 외에 제사가 있는 날이나 명절, 집안에 큰 행사가 있거나 대규모의 과객들이 들어오는 날은 동네의 장정들과 아낙들이 수시로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그냥 사람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일정 수준의 품삯들을 주었기 때문에 동리 사람들은 최부자댁에서 일하는 것을 즐겨 했고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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