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게 올리는 제사, 동학을 일으킨 집안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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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남면 이조리 충의당 근처에 지어진 충노각

↑↑ 박근영 작가
여러 차례 말했듯 ‘경주최부자’라고 할 때 이 집안의 뿌리를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에서 시작한다. 정무공은 가암(佳岩)이라는 호를 썼기에 최부자 가문을 따로 경주 최씨 가암공파라 부른다. 실제 부자는 그로부터 2세대 지난 최국선(1631-1682) 공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정신적 지주 겸, 명가의 품격을 더하기 위해 정무공의 영향을 부각시켰을 것이다.

정무공은 숙종대인 1711년 3월 정무공을 배향한 용산서원이 ‘숭렬사(崇烈祠)’로 사액되면서 ‘불천위(不遷位)’로 봉해졌기에 조상대대로 제사를 거르지 않고 지낸다. 최부자 댁에서는 이 제사를 대제(大祭)라고 부르는데, 이 대제에는 지금도 가암파의 중요한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무공에 대한 제사가 끝날 무렵 아주 신기한 장면이 펼쳐진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대제에 참석했다는 최염 선생님의 회상은 신기할 정도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죽은 노비를 위해 후손들이 대대로 제사 지내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다.

“제사를 다 지냈으니 마땅히 제를 마치고 음복을 해야 할 것인데 사랑방에 모셔진 제사상을 대청으로 가지고 가서 제상에 놓인 정무공 신주를 내리고 거기에 또 다른 신위를 올리고는 다시 제사를 지냅니다!”

그 두 번째 제사가 바로 충노(忠奴) 기별과 옥동의 제사다. 두 노비는 평생 무장(武將)으로 전국을 떠돌았던 정무공을 모시고 다녔고 급기야 병자호란 당시 험천(옛말의 머흐내 / 지금의 성남시 죽전동 어름)전투에서 정무공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충복이다.

아마도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제사가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반상이 엄격한 시대에 노비의 제사를 양반가에서 지낸다니 그것도 자손 대대로 지내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지켜오는 최부자 가문, 정확하게는 최부자집안의 정신적 뿌리인 정무공 가암파 종가댁의 오랜 전통이다. 아울러 조상대대로 그 제사에 참여하면서 뜻을 익혀온 최부자댁에서도 이런 정신을 공유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사연을 알고 나면 이 전통이 얼마나 각별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정무공은 병자호란 때 전쟁에 나가서 순국했다. 그때 정무공을 모시던 노비 옥동이 함께 죽었고 기별이 부상을 입은 몸으로 경주까지 돌아와 정무공의 전사 소식을 전했다. 집안사람들은 두 노비를 가상하게 여겨 정무공 제사를 모실 때 두 노비의 제사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뒤에 나라에서 정무공을 불천위로 봉한 후로 노비들 제사도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정무공 종가댁에 가면 종가댁 근
처에 충노각이라는 비각이 있다. 이 충노각은 바로 옥동과 기별의 행적을 기린 곳으로 여기에는 기별이 정무공과 함께 참전하여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정인보 선생과 최남선 선생이 경주에 와 있으면서 만든 동경지(東京志)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 하리오!’

기념비석에 새겨진 글귀가 숙연하게 느껴진다.

반면 동경지에 따르면 정무공이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교전할 당시, 정무공이 소수의 부하들과 숲에서 쉬고 있을 때 왜군 부대가 쳐들어오자 옥동이 크게 소리치며 내달아 왜군들을 유인한 일화도 전하고 있다. 또 장군이 전국의 전장을 떠돌며 집안 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집안 형편도 알지 못할 때 두 충노가 번갈아 집과 내왕하며 집안 돌보기와 소식 전하기를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나는 최부자 가문의 많은 이야기들 중에 특별히 이 충노에 대한 부분에 유별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국사와 세계사를 통털어 상전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죽은 노비나 노예가 어디 한둘일까. 그런데 주인과 함께 죽은 노비를 후손들이 대대로 제사 지내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풍습이 최부자댁에만 내려오는 것은 정무공과 두 노비, 정무공의 자식들과 두 노비 사이에 신분을 초월한 의리와 교감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는 신분에 대한 최부자댁의 독특한 관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충노각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안 경주시에서 이런 뜻 깊은 일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뜻에서 ‘충노각(忠奴閣)’이라는 비각을 세워 두 노비의 충절을 기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에서 이런 특별한 전통이 없었다면 충노각이 세워지지 않았을 것은 당연하다.


↑↑ 옥동과 기별의 분전을 그린 충의공원 부조


신분에 관용적인 최부자댁 정신은 최치원 선생에서 다분히 영향, 한 집안 최제우 선생의 동학에 영향 끼치기도.

그런데 최부자댁을 오래 취재하면서 이러한 내력이 단지 정무공 당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경주 최씨의 실질적 시조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1857~미상) 선생 역시 신분의 차별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가진 분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최치원 선생은 어려서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 사람으로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유학생을 위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율수 현위직을 거쳐 회남 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바로 이때 황소의 난을 맞아 ‘격황소서(檄黃巢書-흔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 한다)’를 지어 문명을 떨치고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고 이를 계기로 당나라의 많은 문인들과 교류한다. 뒤에 신라에 돌아온 최치원 선생은 헌강왕부터 진성왕 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지방 태수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한 골품제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선생이 건의한 여러 가지 현실 개혁방안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선생은 마침내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고 정계를 은퇴, 전국을 유랑하며 유교와 불교 신선도를 통섭한 대학자가 되었다.

학자들은 바로 이 ‘시무십여조’를 당나라에서 배우고 익힌 폭넓은 정책들을 제안한 것이라고 보고 그중의 하나로 골품제 폐지에 대한 주장을 했을 것이라 가정하곤 한다. 선생은 당시로서는 그래도 상위 신분이라고 할 수 있는 육두품이었고 벼슬도 육두품으로는 최고의 자리인 ‘아찬’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찬은 신라 17관등 중 여섯 번째에 불과했기에 자신의 경륜을 제대로 펼만한 직위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당나라는 유학생인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할 만큼 개방적이었고 소금 장사를 하던 황소(黃巢) 같은 이가 사회 저변을 이끌어 반란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니 신분차별에 대한 비판의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한편 정무공은 문반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무반의 길을 걸은 분이다. ‘문무양반’이라고는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했음을 알면서도 붓을 던지고 칼을 잡은 것은 신분의 귀천보다 나라의 안위를 훨씬 중하게 여긴 때문일 것이다. 신분의 벽을 넘어 국가를 중흥시키려 했던 최치원 선생이나 문무를 가리지 않고 나라를 구하려 했던 정무공의 뜻은 시대는 다르지만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충노의 제사를 모신 바탕에는, 비록 기록에는 없지만 정무공이 살아생전 미리 이런 부탁을 해 놓았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엄정하던 신분사회에서 후손들이 이런 한 제사를 지낼 엄두를 못 내었을 것이다. 정무공이, 나라를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함께 전장을 누빈 노비들을 위해 제사 때 밥 한 그릇 더 올리라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당부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그런 부탁을 양반사회의 관행을 깨면서 후손들에게 대물림 한 가암파 후손들의 결심도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부자댁 집안의 이런 기질은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동학사상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은 처음 동학을 열 때부터 신분제도 타파를 자신을 통해 먼저 보여준 분이다.

수운 선생을 최부자 가문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수운 선생 집안이 정무공의 아들인 최동량 공 대에서 갈라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정무공은 모두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인 동윤 공이 지금 이조의 종손 집안을 이루었고 최부자댁 직계인 동량 공은 셋째 아들이다. 넷째 아들인 동길 공은 정무공의 형님이 후사가 없어 양자로 갔는데 바로 이분이 바로 수운 선생의 직계 조상이다. 수운선생은 정무공의 7대손이고 최부자 종손이신 최염 선생님의 방계 6대조이다.

기왕에 동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동학에 대해 잠깐만 언급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흔히 동학을 서학에 대한 대항의 개념으로 동학이라 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최치원 선생은 벌써 신라 때부터 ‘동(東)’자를 넣은 이름을 자주 써왔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를 동쪽에 위치한 나라라 생각하고 우리나라 사람을 동인(東人)이라 표현하기를 즐겼다. 또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고 모든 것의 발상지라는 뜻으로 매우 신성시 여겼다. 그래서 최부자댁에서도 조선 사람들을 ‘동인’이라고 표현해왔다는 것이 최염 선생님의 증언이었다. 이런 사상을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최제우 선생이었기에 ‘동학’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썼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동학에 대해 굳이 서학의 대응 개념으로 포장했지만 최부자댁의 오랜 사상적 기반을 고려할 때 그런 대응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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