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0-1] 경주 사천왕사 터(上)

신령한 산 낭산과 나라 구한 사천왕사[1]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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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진 고선사 터 삼층석탑과 석재유물.


도리천이 흐르고 신들이 거니는 산, 낭산

칠흑의 밤이다. 한밤중에 문득 두드리는 소리 있어 밖을 보니,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초승달 너무도 가까이에 와 있다. 어디를 따라나서자는 말씀처럼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 단 한 말씀도 없으시다. 홀린 듯 서둘러 채비하고 길을 나선다. 어둠이 지워놓은 길과 어둠이 살려놓은 길과 내가 본능으로 직감하고 가는 길이 서로 다르지 않으니, 오늘 하루도 길고 뜨겁겠다.

경주는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품은 토함산과 수많은 불상과 능을 안은 남산이 경주를 포근히 끌어안아 재우는 새벽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가야 할 곳은, 두 산 못지않게 신라시대에 큰 영향력을 미친 낭산이다. 낭산은 일곱 개의 가람 터 중 여섯 번째로 토착 신(神)이 머무는 신령한 산이다. 신라 사람들은 신유림(神遊林) 또는 불교 세계의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수미산(須彌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부처가 계시고 신들이 거닐고 노니는 가장 신성한 숲이니 백성들은 어쩌면 낭산을 먼발치에서만 관망만 할 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신라본기》 실성 이사금 12년(413년)에는 낭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2년 가을 8월에 낭산(狼山)에서 구름이 일었는데, 마치 누각(樓閣)과 같고 향기가 가득하여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왕이 이르기를 “이는 필시 신선(神仙)이 강림하여 노는 것이니, 아마도 이는 복된 땅이리라.”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낭산의 나무 한 그루라도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다.’

묽은 어둠이 잠식한 낭산으로 몸을 들인다. 낭산은 해발 108m의 낮은 야산이다. 동서로는 폭이 좁은 반면, 남북으로 뻗은 산세는 풍만하여 이 모습을 두고 어떤 이는 누에고치와 흡사하고, 어떤 이는 짐승 이리가 웅크린 것과 같다 하여 이리 ‘낭(狼)’ 자가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史記)’에는, 동쪽의 큰 별을 ‘낭’으로 부른다고 했다.

 그러니 어떤 물체나 짐승의 형상 때문이 아니라 신라 왕궁의 동(남)쪽에 있다 하여 낭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처럼 낭산은 비록 작은 규모의 산이지만 의미와 깊이를 알고 나면 신라라는 사회에서 얼마나 큰 의미의 산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낭산은 내게 ‘귀족의 땅 여왕의 나라’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변방의 문외한처럼 풀밭을 왕래하는 자발적 빈민을 자처하며, 마음의 거리로부터 먼 곳이기도 했다. 아마도 왕과 관련된 곳들이 적지 않음에서 오는 어떤 괴리감 같은 것이었을 게다.

문무왕을 화장해 유골을 빻았다는 능지탑과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그리고 도리천에 쓴 선덕여왕릉, 호국사찰 사천왕사 터, 국보로 지정된 구황리 삼층석탑과 황복사 터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신라 왕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낭산과 함께 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 동탑 터에서 바라본 서탑 터와 금당 터_가운데 볼록한 곳이 금당 터다.

신라 최초 여왕 선덕(덕만, 신라 제27대 왕)은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했다.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에 있는 곳이라 여기며 왕이 말한 곳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왕이 신라의 수미산은 낭산이요, 도리천은 낭산의 남쪽 봉우리라고 알려 주었다. 왕이 죽자 생전 왕이 지목한 낭산 남쪽 어귀에 장사 지냈다. 훗날 문무왕이 나라를 위해 사천왕사를 지으니 그곳이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다.

잠결에 초승달은 왜 나를 깨워 낭산으로 불러들였을까. 아직 동트지 않은 시각, 지금이 신들이 거니는 시각일까. 바람이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낭산 숲에서 한 무리 새가 날아오른다. 신들은 지금 어디를 거닐고 있을까. 나는 천천히 걸어 낭산 자락으로 몸을 들인다.

서서히 걷히는 어둠 속에서 사천왕사 터의 굴곡이 얼비친다. 가깝고 먼 곳이 덜 어둡고 더 어두움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낸 길을 가로지르니 돋아 올린 동탑 터와 서탑 터의 굴곡이 자연스럽게 휘어져 있다. 몇 계단을 올라 절터에 올라서니 꽤 너른 풀밭이 펼쳐진다. 풀밭 위로 돋아 올린 단이 여럿이다. 본존불이 안치된 금당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로 동탑 터와 서탑 터가 있고, 북방으로 좌경루 터와 우경루 터가 있다.

금당 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이 서서히 묽어지고 있는 걸 보니 곧 동이 트겠다. 어느새 풀밭은 세월을 거슬러 나를 세워 놓는다. 바람과 햇살, 나무와 풀, 새와 짐승, 그리고 온갖 이야기들이 신화처럼 일어나 내게 이야기를 흩어놓는다.

불경에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흐른다고 한다. 도리천은 육욕천(六欲天)의 둘째 하늘로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데, 가운데에 제석천(帝釋天)이 있고 그 사방에 하늘 사람들이 거처하는 여덟 개씩의 성이 있다고 한다. 즉 도리천은 이상 세계를 말한다.

↑↑ 풀밭에 석조물이 깊게 박혀 있다.


당나라의 위협에서 계책을 고민하다

문무왕 19년(679) 낭산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신라 사람들은 그제야 도리천에 무덤을 쓰게 한 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고 탄복했다. 도리천은 사천왕천 바로 위에 있는 하늘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다. 어쩌면 여왕은 훗날 도리천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질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으로 정했는지 모른다.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 제29대 왕) 김춘추(金春秋, 604~661)의 뒤를 이어, 통일을 이룬 문무왕(文武王, 신라 제30대 왕) 김법민(金法敏, 626~681)은 679년(문무왕 19)에 전쟁의 긴박함 중에 사천왕사를 짓는다. 통일을 염원했던 선덕여왕의 뜻을 받들어 수미산 도리천 여왕의 능 아래, 나라를 위해 사천왕사를 지은 것은 철저하게 불교의 이치를 따르고 불교에 의지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였으리라. 문무왕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군사들을 사천왕사에 열병시켜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문무왕이 즉위했을 때는, 삼국이 통일되었다지만 불안정한 시기였다. 연합으로 전쟁을 치른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는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삼국유사》 ‘기이 2’ ‘문무왕(文武王) 법민(法敏)’ 편을 보면 사천왕사를 세운 배경이 자세히 실려있다.

신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친 당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않았다. 옛 고구려 땅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는 것을 알고 문무왕이 군사를 보내 먼저 당나라 군대를 쳤다. 이것을 안 당나라 황제 고종이 당나라에 숙위(宿衛) 중인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 629~694)을 불러 질책한 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장수 설방(薛邦)에게 군사 50만을 주어 신라를 치라고 했다. 이때 당나라 유학 중이던 의상(義湘, 625~702)이 옥중 김인문을 찾아가 만나니, 이 사실을 전해주며 빨리 신라로 돌아갈 것을 청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이 급히 왕을 만났다. 김인문으로부터 들은 말인즉 ‘곧 당나라가 신라를 칠 것이다. 대비하시라.’는 것이었다. 왕이 심히 걱정하며 군신을 모아놓고 방비책을 물었다. 그때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최고 관직) 김천존이 아뢨다.

“요사이 명랑법사가 용궁에 가서 비법을 전수받고 왔으니 청컨대 조서로 물으십시오”

왕은 명랑법사를 불렀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다음호 1648호 경주 사천왕사 터(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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