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문파 선생 형제들의 일제강점기 삶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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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최완 선생의 집. 최부자댁 본가 왼편에 교동법주집을 지나 있다.

↑↑ 박근영 작가
2024년 8월15일, 광복절 맞은 대한민국이 희한하게 오염되었다. 국영방송 KBS가 하필 광복절에 되자마자 기미가요와 나비부인을 내보내고 제멋대로 조작된 이승만 홍보 영화를 틀어 국민적 공분을 샀다. 헌법은 물론 이승만조차 인정한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정부요직을 꿰차는 것도 모자라 독립운동기념관 관장까지 친일파가 점거했다.

이런 시국에 최부자댁과 관련한 독립운동을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이미 알고 있듯 문파 선생님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전 재산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낸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아주 일부에서는 친일파라 불리기도 했다. 해방직후 구성된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로 검거되었다가 가장 먼저 혐의를 벗고 나왔으며 1990년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간행할 때도 친일 인물에 올랐다가 심의 후 가장 먼저 제외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친일파로 몰린 이유는 백산무역을 준비하시던 시기 문파 선생님이 일부러 도평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감시망을 현혹하기 위한 위장용이었다. 비슷한 예로 손병희 선생이 기생집을 출입하며 돈을 뿌리는 시늉을 했고 안희제 선생이 일본인 여인과 살림을 차리는 등으로 일본인들의 눈을 속이던 모습도 그런 눈속임이었다. 문파 선생님의 바로 아래 동생인 최윤 선생은 최부자댁 친일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이분은 한량기질이 있어 말 타고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즐겼고 서예와 그림, 바둑 등 다방면의 예술 활동에 정통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판소리 명인으로 불렸던 박동진 선생이 이분께 거문고를 배웠을 정도로 음악에도 범상치 않은 조예를 가졌다. 이분이 친일파로 낙인찍힌 것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기 때문이다. 원래 이 중추원 참의 자리는 문파 선생님에게 제안된 자리였다. 당시 이미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여파로 가산이 모두 조선척식은행에 저당 잡혀 있을 때였다. 당연히 일제의 압력이 날로 가중될 때였다. 그러나 문파 선생님이 끝까지 사양하자 집안의 화를 막기 위해 최윤 선생이 대신 나서 참의 자리를 받은 것이다.



셋째 최완 선생, 상해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활동. 간악한 일경의 음모로 귀국 후 순국

셋째 동생은 프랑스 조계 상해임시정부시절 재무위원을 지내신 최완(1889-1927) 선생이다. 재무위원이면 요즘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중책이다. 이분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헤어날 수 없는 병을 얻었고 그로 인해 출옥하자마자 돌아가셨다. 최완 선생이 귀국해 일경에 체포된 데는 당시 경주경찰서장의 음흉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먼저 문파 선생님에게 접근해 친한 척한 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문파 선생님의 필적을 얻어냈다. 이어 이를 흉내 내어 최완 선생에게 ‘집안에 위급한 일이 있으니 한 번 다녀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일경의 간계를 알 턱 없었던 최완 선생은 귀국하는 즉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셨다.

최완 선생은 존 무초 미국 대사 편에서 말했듯 해방후 국방장관을 지낸 신성모 씨, 내무장관을 지낸 이효석 씨와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이 두 사람 역시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교촌의 최완 선생댁에 1년 넘게 숨어 지냈다.

 문파 선생님 역시 이 두 사람을 잘 알았고 일제에 들키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쉽사리 망할 것 같지 않자 두 사람은 각각 영국과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최완 선생이 두 사람의 망명길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 3백석 중 2백석을 팔기 위해 문파 선생님과 상의했다.

 그러자 문파 선생님이 ‘많지 않은 재산을 그렇게 다 쓰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만류한 후 자신의 재산 중 2백 석을 내어 망명길을 돕기로 했다. 그러나 최완 선생은 ‘이것은 자기 일이기도 하다’며 끝까지 1백 석은 당신의 재산으로 대치, 이들을 망명시켰다.

신성모 씨는 영국으로 가서 뒤에 상선을 타며 선장이 되었고 해방 후 귀국했을 때 탁월한 영어 실력과 온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이승만의 눈에 들어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효석 씨 역시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는데 해방 후 귀국하여 신성모 씨의 추천으로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그러나 최완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된 뒤여서 두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두 인물은 뒤에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부역해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막내 동생 최순 선생은 문파 선생님을 도와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상무이사로 지내면서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한 분이다. 이분은 해방 후 재헌국회의원선거에서 출마했지만 뜻하지 않게 암살당했다. 경주시사(慶州市史)에도 나오는 이 이야기는 고등계 형사 출신의 서영출이라는 친일파와 관련 깊다.



고등계 형사에 의해 암살당한 막내 최순 선생, 해방후 경주에서는 이협우 같은 악한이 대량 학살 일삼아

‘고등계’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사람의 독립운동 동향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일을 맡아보던 경찰 부서를 일컫는다. 여기에는 특히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경찰들이 대부분으로 일본은 말이 쉽게 통하고 행동 습성을 잘 아는 동족을 통해 수사에 능률도 올리고 한편으로는 한국인 간에 서로 적대시하는 이간(離間) 효과도 노려 전국 각 경찰서에 고등계란 이름의 앞잡이들을 두루 심어 놓았다. 서영출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이 서영출 역시 해방 후 대부분 친일경찰들처럼 잡혀가기는커녕 일본인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에 눌러살면서 마치 자신이 독립지사라도 되는 양 청년단 관계의 일을 하며 온갖 포악한 짓을 일삼았다.

최순 선생은 평소 대쪽 같은 성품을 지녔는데 고등계 형사 출신의 서영출이 애국자인 양 행세하는 꼴을 보고는 대놓고 야단을 친 적이 있어서 두 사람 사이가 매우 차가웠다. 그 상태에서 최순 선생이 재헌의원에 당선되면 서영출이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서영출은 궁리한 끝에 서북청년회 사람들을 사주해 최순 선생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당시를 회고한 최염 선생님 말씀!

“당시의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어느 날 내가 마당에서 노는데 이북 사람 하나가 막내 종조부를 찾아와서 한동안 심각한 말을 나누고 돌아갔어요. 그가 사흘 후에 다시 왔다가 30분쯤 후에 돌아갔어. 그런데 들어갈 때 못 보았던 큰 가방을 들고 나갔어요. 며칠 후에 종조부님이 또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나가셨는데 그 길로 싸늘한 주검이 되셨어요!”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서영출에게 의뢰를 받고 최순 선생 암살을 모의한 이북 사람 한 명이 문파 선생님을 찾아와 사실대로 고해바쳤기 때문이다.

“그 이북 사람이 할아버지를 암살한 일로 서영출에게 또 다른 해코지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할아버지께 와서는 일본으로 밀항할 자금을 대달라고 청하면서 서영출의 범행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지요” 

문파 선생님은 즉시 경찰에 고발해 그와 서영출, 또 다른 이북 사람 하나를 법정에 세웠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문파 선생님이 서영출을 벌주기 위해 온갖 청원을 다 하고 다니셨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끝내 그를 벌 줄 수 없었다. 거대한 권력의 힘이 서영출 뒤에 도사리고 있어서였다.

일제강점기를 지난 해방 후까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데 유명한 고등계 형사 노덕술은 바로 그런 대표적인 자였다. 경주시 내남면 출신의 이협우라는 자 역시 그보다 더 악질적인 고등계 경찰이었다. 그자 역시 이승만의 비호 아래 형을 살기는커녕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이협우는 1949년 내남면 민보단장을 지냈는데 이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경주 내남면 일대에서 ‘보도연맹사건’을 일으킨 흉악한 범죄자다. 그는 좌익 색출을 명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풀었는가 하면 좌익과 상관없는 양민들까지 대거 좌익으로 엮어 학살해 틈수골 등에 매장했다. 그런데도 온갖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권에 빌붙은 결과 제2대,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어이없는 정치적 호사를 누렸다. 우리나라 독립 운동 역사의 아이러니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형제분 중 한 분은 내놓고 격렬한 독립운동을 했고 두 분은 국내에서 암암리에 독립자금을 대셨다. 또 한 분은 일제 앞잡이의 정점이라 불리던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 집안에서 이처럼 대조적인 행보를 펼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최부잣집 종손이자 집안의 가주로서 문파 선생님의 고충이 느껴진다. 나라를 되찾고자 기울이는 노력 이면에 수백 명 집안의 가주로서, 오랜 명가의 종손으로서 조상을 빛내고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책임의식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언제 뜻밖의 사건으로 잡혀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디디고 계셨음에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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