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0-2] 경주 사천왕사 터(上)

신령한 산 낭산과 나라 구한 사천왕사[2]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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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7호 경주 사천왕사 터(上)에 이어

↑↑ 복원한 서탑 기단부 벽면에 복제한 녹유신장상을 붙여 놓았다.


문두루비법으로 나라 구한 밀교(密敎) 승려 명랑(明朗)

명랑은 632년(선덕여왕 1)에 당나라로 건너가 비밀 불교인 밀교(密敎)의 비법을 배우고 635년(을미년, 선덕여왕 4)에 신라로 돌아왔다. 《삼국유사》 신주(神呪) 편에는 명랑이 환국할 때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랑은 환국하는 길에 해룡의 청을 받아 용궁에 갔다. 명랑은 비법을 전수해 주고, 금 천냥을 받았다. 명랑은 이걸 가지고 땅속으로 와서 신라 본가 집 우물 밑 명치에서 솟아 나왔다. 이어 자기 집을 절로 만들고 용왕이 시주한 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유달리 빛이 났으므로 금광사(金光寺)라고 하였다’

명랑의 어머니는 자장율사의 누이동생 남간부인이고 아버지는 신라 사간(沙干, 신라 17관등 중 8등) 재량(才良)이다. 재량에게 아들이 셋이었으니 맏이가 국교(國敎) 대덕이요, 둘째가 의안(義安) 대덕이고, 셋째가 명랑(明朗) 법사다.

문무왕은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명랑법사를 불러 당나라 군대를 막을 계책을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려 보자고 했다. 그때 정주(貞州, 지금의 개성)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이미 당나라 군사가 국경 바닷가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명랑은 곱게 물들인 비단으로 절의 형태를 흉내 내고 오방신을 만들어,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에게 문두루비밀지법(文豆婁秘密之法, 만다라)을 쓰게 했다. 무슨 연유인지 당나라 군대는 큰 풍랑을 맞고 모두 침몰하였다. 문무왕은 낭산 남쪽 기슭에 절을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다.

그 뒤 671년 당나라 군사가 다시 신라를 침범했지만 예와 똑같이 문두루비밀지법을 행하니 모두 침몰하였다. 당 고종이 이를 알고 당시 옥중에 있던 신라 한림랑(翰林郎,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한림대(翰林臺)의 우두머리) 박문준과 김인문 중 박문준을 불렀다. 신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대군을 보냈는데 두 번이나 모두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문준은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 되므로 본국의 일을 잘 알지 못하지만 듣건대, 귀국의 은혜로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은덕을 갚기 위하여 절을 짓고 법석을 열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빈다고 했다.

황제가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귀를 신라에 보내 사천왕사를 살펴보게 했다.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사천왕사 인근에 새로운 절을 지었다. 신라 대신들은 악붕귀를 새로 지은 절로 인도했다. 약붕귀는 사천왕사가 아닌 것을 알고 ‘망덕요산지사(望德遙山之寺)’라며 노여워하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들이 황금 천 냥을 주었더니 당나라로 돌아가 신라가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더라고 아뢨다. 이후 문무왕은, 강수에게 명하여 당 고종에게 김인문을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는 표문을 쓰게 했다.

 이는 당 고종이 신라를 의심할 때 옥에 있던 한림랑 박문준이 잘 아뢴 것에 황제가 감동하여 너그럽게 사면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표문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 김인문을 사면하고 위로하여 신라로 돌려보냈다.

↑↑ 산업도로 변에서 바라본 사천왕사 터 전경. 가장 앞쪽에 동쪽 귀부가 풀밭 한가운데 엎드려 있다.


복원한 서탑 기단 벽면에 사천왕의 생생한 모습 담은 녹유신장상


사적 8호로 지정된 사천왕사 터에 올라 본다. 좌우에 단을 돋운 동탑과 서탑 터가 먼저 눈에 띈다. 사천왕사 터는 신라 최초의 쌍탑 가람 터로 알려졌다. 풀과 풀 사이에 석조물이 엎어져 있다. 동·서탑 터를 지나 금당지를 지나 회랑 터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시간을 살면서 풀들은 또 얼마나 쓰러지고 일어섰을까.

사천왕사는 신라 문무왕 19년(679년)에 경주 낭산 기슭 신유림(神遊林)에 세워진 호국사찰이었다. 1915년인 일제강점기에 첫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이 나온 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재발굴하여 녹유신장상 파편 여러 개를 발굴했다. 녹유전(綠釉塼)은 녹색 유약을 칠한 벽돌이다. 신장상은 모두 3명으로, 신라 최고 조각가 양지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 서탑 기단부 벽면에 붙어있는 녹유신장상 복제품.

서탑 터에는 탑 기단 벽체를 복원해 놓았는데 벽면에 녹유 신장상을 복제해 붙여 놓았다. 큰 눈과 콧수염, 날개 달린 투구와 화려하고 세밀한 갑옷,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칼이나 화살을 들고 있는 무장한 신장은 험악하거나 때로는 여유로운 표정마저 지니고 있다. 하나같이 악한 것들을 밟거나 깔고 앉아 보는 이에게 악한 마음을 품지마라 이르는 것만 같다. 세밀하게 빚어낸 솜씨가 경지에 다다른 듯하다.

불교의 세계에서는 중심에 수미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서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흐르고, 주변 대륙 네 곳을 지키는 천부의 왕들을 사대천왕(四大天王),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부른다. 조금 큰 절의 입구마다 천왕문(사천왕문)이 있는데 절에 따라 해탈문이나 금강문이 있기도 하다. 천왕문에 들어가면 사천왕 조각상이 왼쪽에 2좌(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오른쪽에 2좌(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있는 구조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네 하늘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므로 보통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근육질로 묘사하며 자세도 위압적이다. 크기도 사람을 압도하도록 거대하게 만든다. 마구니, 잡귀를 발로 밟고 있는 모습도 있다.


↑↑ 사적비의 받침돌로 추정하는 동쪽 귀부.


문무왕릉비(碑)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천왕사 귀부

절터 앞 산업도로 아래 풀밭에는 두 기의 거북이 형상의 비석 받침대(귀부)가 동서로 하나씩 엎드려 있다. 비석은 신라 멸망 후 어느 시기 파손된 채 잊히다가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가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청나라 유희해(劉喜海)가 한반도의 각종 금석문의 탁본을 모아 1832년에 편찬한《해동금석원》에 실었다.

상단부의 소편(小片) 1개는 2009년 경주문화원(舊 박물관) 옆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문무왕릉비는 사천왕사 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碑)에는 삼국통일을 이뤄낸 문무왕을 기리는 내용으로 비문은 급찬(級飡, 신라 9등 벼슬) 국학소경(國學少卿)이었던 김??(마모로 알아볼 수 없음)이,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썼다고 기록했다.

풀밭에 동서로 놓여있는 귀부 중 동쪽에 있는 것은 사적비의 받침돌, 서쪽에는 문무왕릉비의 받침돌로 추정한다. 당대의 다른 왕의 비는 왕릉 앞에 세워졌지만, 문무왕은 동해에 불교식으로 장사를 지냈기에 왕릉이 없다. 사천왕사 터의 귀부 2개가 문무왕릉비 크기와 크기가 맞아떨어진다고 하니 어쩌면 여기 있는 거북이가 짊어지고 있던 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무왕릉비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재위 2년(682) 7월 25일에 세웠다. 부왕이 나라를 위해 세운 절에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가설이 낯설지 않다.

일제가 개설한 동해남부선 광궤 폐철길과 지금은 산업도로가 된 경주, 울산 간 신작로가 옛 절터의 강당 터 일부를 파괴하면서 사천왕사 터를 옥죄고 있는 듯하다. 사천왕사는 없지만 풀밭에 서서 호국사찰의 위엄을 상상해 본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전장으로 나가기 전 사천왕사 앞에 도열한 군사의 사기를 돋우던 문무왕의 위엄이 들리는 듯하다.

저 무성한 풀밭에 엎드린 채 천년 동안 꿈쩍 않는 저 거북이는 언제 풀밭을 기어 나올까.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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